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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의 고난속에 큰 기회있다] <22> 암울했던 1980년의 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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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의 고난속에 큰 기회있다] <22> 암울했던 1980년의 대학

입력
2009.12.01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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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2ㆍ12 사태로 박정희 유신체제가 무너져 우리는 모두 환호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곧 이어 군부가 계엄령을 선포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1980년 5월에 들어서는 전두환 군부퇴진과 계엄해제를 요구하는 학생데모가 매일 서울 시내에 들끓었고 중앙대에서도 정상수업이 어려웠다. 그러다가 5월14일부터는 10만이 넘는 학생데모대가 매일 서울 시내를 뒤덮기 시작했다.

여기에 놀란 군부는 5월18일 영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모든 대학의 휴교와 일체 정치활동 금지를 포고하고 김대중씨와 김종필씨를 구속했다. 여기에 항거하여 일어난 것이 5ㆍ18 민주화운동이었으며 얼마 있다가 김대중씨에게는 사형이 선고 되었다.

당시 신군부는 5ㆍ18 운동을 공산세력이 배후에 있는 폭동이라고 했다. 엄격한 언론통제 하에 있던 당시 신문ㆍ방송에서도 대부분 그렇게 보도했다. 어쩌다가 육필로 써 프린트한 지하신문에서 광주의 처참한 상황을 단편적으로나마 접하게 되면 치밀어 오르는 울분을 억누를 길이 없어 하염없이 북한산을 빙빙 돌다가 집에 돌아오던 기억이 있다.

이 때 나는 중앙대 경제학과장으로 있었고 4년 뒤인 84년에는 정경대학장직을 맡게 되었는데 이러한 보직을 맡고 있는 동안 나는 학생들의 반정부 운동 때문에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학생들은 적게는 수백명 많게는 천 여명씩 모여 스크럼을 짜고 '전두환 물러가라'구호를 외치면서 교문을 나가 최루탄으로 맞서는 경찰과 보도블럭을 깨 투석으로 대치하는 것이 매일 같은 일과였다. 이 때문에 대학주변의 보도블럭을 모두 철거하고 콘크리트로 대체 했다. 학교에는 중앙정보부 요원과 경찰 정보계 형사가 무상 상주하고 데모를 주도한 누구누구 학생은 처벌하라고 공공연히 압력을 행사하던 그런 때였다. 김대중 민주화운동에 연루되었던 유인호 경제학과 교수는 면직시키라는 지침도 내려와 있었다.

나는 주동학생들을 불러 모아 퇴학이나 정학의 우려가 있으니 이 시기만 잠시 조용히 넘기자고 타일렀으나 그들은 너무나 완강했다. 나는 학생운동을 지지하는 입장이었지만 학장으로서 학생들의 희생만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학생 처벌에는 끝까지 반대했으며 결과적으로 정경대학에서는 단 한 사람의 희생자도 없었다. 지나고 보니, 그 때 학생운동을 주동했던 학생들이 모두 훌륭하게 성취한 사회인이 되었다. 그 중 몇 사람은 지금도 가끔 나를 찾아 주고 있다. 나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고 남과 사회의 이익을 위해서 기존 질서에 저항하는 젊은이는 큰 재목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내 경험을 통해 터득했다.

이 때 잊혀지지 않는 일화 하나가 있다. 1980년 11월30일, 이 날은 전두환 정권의 언론통폐합조치에 의해 동양방송(TBC)이 문을 닫는 날이었다. 아나운서의 목이 메인 고별사를 듣고 잠이 들었다. 그 때 우리는 역촌동의 단독주택에 살고 있었는데 아래층에는 작은 방에 고1 학생인 장남 진(현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이, 그리고 큰 방에는 어머니가 다른 아이들과 자고 있었고 2층에서는 우리 내외가 자고 있었다. 새벽에 "어머니 놀라지 마세요"라고 하면서 노크하는 아들 목소리에 문을 열고 보니 복면한 강도 한 사람이 칼을 들고 아들의 두 손을 뒤로 묶어 밀고 들어왔다. 이어 누워 있는 나의 두 손을 뒤로 묶고는 돈을 내라는 것이었다.

나는 우선 "이 사람도 우리와 똑 같이 좋은 사람이다"라고 모두를 안심시켰다. 그리고는 누워 있는 채로 그 사람과의 대화를 시작했다. 내가 대학교수임을 밝히고 "얼마나 어려웠기에""이런 일의 책임은 사회에도""나는 당신보다 나으니"등의 얘기에서 시작하여 내가 어려움을 이겨온 지난 경험을 말해주면서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말라고 호소하듯 말했다. 그러면서 돈은 있는 대로 내놓을 테니 나도 살아야 하니 다 가져가지 말고 서로 나누자고 했다. 그는 "저는 이미 버렸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나의 묶은 손을 풀어 주었다.

그 뒤 나는 앉아서 통행금지가 풀리는 새벽 4시까지 그와 얘기를 계속했다. 그는 돈을 집어넣으면서 일부는 남겨놓았는데 이것이 고마웠다. 그가 집을 나갈 때 "쌀이나 옷 또는 양주를 가져가겠느냐"고 물었더니, "쌀이나 옷은 필요치 않다"며 양주만 한 병 들고 나갔다. 그는 나가면서 "미안하다"고 인사를 했고 집사람은 대문 앞까지 나가 "조심해 가라"하면서 그를 마중했다. 그 뒤 나는 강연을 하면서 우리는 이제 도둑도 쌀이나 옷은 가져가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 사람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82년에는 역촌동 집에서 서오릉 입구에 있는 갈현동 집으로 이사를 했는데, 84년 5월12일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농촌에서 농사일과 길쌈으로 찌드는 고생을 하시며 나를 기르고 대학의 뒷바라지를 하셨던 어머니가 가시고 보니 그 허전함이란 말할 수가 없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어머니를 좀더 잘 모시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움이다. 다만 22년간을 서울에서 모시고 살았고, 손자녀 보는 것이 소원이라 하셨는데 손자녀 다섯에 장손은 서울대 2학년에 다니는 것까지 보고 아흔으로 비교적 장수 하신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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