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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제기 기자의 Cine Mania] 현실은 영화보다 더 참혹하다

입력
2009.12.01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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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소말리아의 18세 소녀 사피요 아댄 하산을 만났다. 취재차 찾아간 우간다의 한 장애인 부랑아 보호시설에서였다. 그의 품엔 10개월 된 아이가 안겨있었다. 아빠는 알 수 없었다. 내전 와중에 군인들에게 강간을 당해 생겨난 아이였다. 아댄에게 아이는 불행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희망의 씨앗이기도 했다.

아댄의 사연은 지난해 국내 개봉한 보스니아 영화 '그르바비차'에 그대로 포개진다. 보스니아 내전의 와중에 에스마는 포로수용소에서 원치 않는 임신을 한다. 그렇게 낳은 딸 사라는 희망과 절망이 접붙은 샴쌍둥이와 다를 바 없다. 영화는 내칠 수도 껴안을 수도 없는 천륜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고발한다.

영화는 현실을 반영한다. 하지만 현실은 영화보다 더 참혹하고 잔인하다. 영화는 영화로서 끝을 맺지만 현실은 지속된다. 출생의 비밀을 안 사라는 엄마와 고통을 조금씩 치유해 간다. 마음이 먹먹하면서도 따스했다. 캐나다 이민을 꿈꾸던 아댄은 어찌됐을까. 막막하게 반짝이던 커다란 검은 눈동자가 아직도 가슴을 찌른다.

필리핀의 브릴란테 멘도사 감독의 '키나타이'는 참 잔혹한 영화다. 경찰학교 학생 페핑은 결혼자금 마련을 위해 깡패들의 밤일에 따라나선다. 돈을 갚지 못한 창녀의 버릇을 고치겠다던 깡패들은 살인을 한다. 시체는 여러 갈래로 찢긴다. 팔이 찢겨나가고 다리가 떨어져나갈 때, 이 영화가 출품된 올해 칸국제영화제의 관객들도 뭉텅이로 떨어져나갔다.

페핑은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범죄현장에 끌려다니다 몇 푼의 용돈을 받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 무력감이 불쾌했고, 그 불쾌감을 전달하려는 감독의 의도가 불순하게 느껴졌다. 사회비판 정신이 담긴 독립영화라는 호평도 나왔지만 관음증적인 악취미가 엿보인다는 악평이 쏟아졌다. 사실적인 묘사 때문에 스너프 필름(Snuff Filmㆍ실제 살인 장면 등을 담은 영화)일 수 있다는 고약한 소문까지 돌았다. 그러나 칸영화제는 감독상을 주며 멘도사를 격려했다. 많은 기자들과 평론가들처럼 칸의 선택에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최근 '키나타이'의 연출 의도를 조금이나마 가늠할 수 있게 됐다. 역설적이게도 필리핀의 악몽 같은 현실 때문이다. 57명이 희생당한 최악의 정치테러에 필리핀 군인과 경찰이 가담했다고 한다. 암묵적으로 광포한 폭력에 동의해야 했던 경찰학교 학생 페핑의 모습이 떠올랐다. 멘도사는 불의에 눈을 질끈 감거나 협잡하지 않으면 살아 남을 수 없는, 필리핀의 현실을 그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독한 사회가 결국 독한 영화를 낳는가 보다.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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