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아침을 열며] 옥스퍼드 영어사전과 독서광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아침을 열며] 옥스퍼드 영어사전과 독서광

입력
2009.12.01 00:34
0 0

얼마 전 영국 옥스퍼드대 출판사가 '올해의 단어'로 '언프렌드(unfriend)'를 선정했다. 온라인상의 친구 관계를 끊는 행동을 의미한다. 2008년에는 연비를 최대화하기 위한 각종 조치를 뜻하는 '하이퍼마일링(hypermiling)'이 선정됐다. 옥스퍼드대 출판사의 올해의 단어가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는 이유는 이 출판사가 펴낸 '옥스퍼드 영어사전(OED)'의 무게감 때문일 것이다.

정신병 무기수도 힘 보태

19세기에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었던 영국은 문화적으로는 아직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에 뒤지고 있었다. 이를 따라잡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영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1928년 무려 71년의 산고 끝에 '옥스퍼드 영어사전'제1판, 전 10권이 간행됐다. 이 사전은 편찬 방침이 매우 독특했다. 한 어휘가 태어나 성장하고 사라지는 전 과정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표제어 하나하나의 탄생과 성장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그 어휘가 탄생한 후의 의미 변천을 인용문과 함께 일일이 밝혀야 했다. 같은 어휘라도 그 뜻이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른바 '역사적 원리에 입각한(Based on Historical Principles)'편찬 방침이다. 모든 영어 단어가 지닌 의미의 역사를 밝힌다는 것은 영어로 된 '모든'문헌들을 읽어야 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 어마어마한 계획은 사전 편집자 수십 명의 힘만으로는 실현될 수 없는 것이었다. 영어로 쓰인 문학작품 '전부'를 검토하고, 런던과 뉴욕의 신문 잡지 학술지를 샅샅이 검토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작업을 하나로 엮어내야 했다. 그야말로 엄청난 규모의 협력체제가 가동되어야 했다. 실제로 보수를 받지 않는 8백여 명의 자원봉사자가 작업에 참여했다.

수많은 자원봉사자 중에서 정력적으로 빼어난 예문들을 보내오는 윌리엄 체스터 마이너란 인물이 있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 편집인이었던 제임스 머리는 평소 이런 마이너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써서 여러 차례 그를 사전편찬위원회가 있는 옥스퍼드대로 초대했다. 하지만 마이너는 번번이 사양하고 좀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두 사람은 거의 20년 동안 한 번도 만난 적 없이 오직 편지를 통해서만 의사 소통을 했다.

편지 겉봉에 표기된 마이너의 주소지는 정신이상 범죄자를 수용하는 정신병원이었다. 제임스 머리는 마이너가 정신병원에 근무하는 의사일 거라고만 짐작했다. 그러나 20년 만에 마이너를 찾아가 직접 만나보니, 그는 그곳에 수감된 무기수였다. 미국의 명문가 출신인 마이너는 예일대 의대를 나온 뒤 남북전쟁에 군의관으로 참전했다가 정신질환으로 제대하고 영국에 건너와 충동적으로 사람을 총으로 쏴 죽이고 정신병원에 갇힌 신세였다. 이렇게 세상과 단절된 채 정신병으로 고통을 받던 마이너는 우연히 자원봉사자를 구한다는 호소문을 읽고 사전제작 업무를 돕기 시작했다. 비록 살인을 저지르긴 했으나 뛰어난 학자 기질을 가진 그는 수용소에 갇힌 채 사전 제작을 도왔다.

활자문화 시드는 우리 현실

병원 측은 이 일을 정신병 치료 과정으로 인정하고 마이너에게 방을 하나 별도로 배정했다. 그는 상속 받은 재산으로 책을 사들여 개인 도서관을 꾸몄다. 옥스퍼드 영어사전 편찬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이 사전이 마이너와 같은 수많은 독서광들의 협력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었음을 깨닫게 된다. 공공 도서관에 버금가는 방대한 개인 장서를 갖춘 독서광 800여 명이 협력해 '세계 최고의 사전(The Greatest Dictionary in Any Language)'을 완성시킨 것이다.

활자문화가 미처 전성기를 누리기도 전에 시들어가는 우리 사회에도 이만한 우리말 사전이 등장할 수 있을까?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