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은 '10ㆍ2시위'로 촉발된 학생들의 반정부투쟁에 대해 마구잡이로 연행해 구속했지만, 불과 두 달도 안 된 12월 7일 대통령특사로 전원 석방했다. 나도 이 때 석방되었다.
이듬해 봄에는 학생들의 반정부투쟁이 더욱 치열해질 것이고 심지어 박 정권의 존립이 우려되는 상황이었는데, 어째서 구속한 학생들을 전원 석방했는지는 알기 어려웠다. 아무튼 민주세력으로서는 더욱더 기세가 등등해졌고, 여기저기서 유신헌법을 비판하는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나는 우이동에 하숙방을 구했는데, 경찰의 감시가 심한데다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이따금씩 연락을 해 와 그 집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소선 어머니에게 있을 만한 방을 하나 구해달라고 부탁했더니 자기가 다니는 교회의 집사네 집에 방이 있다고 했다.
곧바로 그 방으로 옮기고는 경찰도, 치안본부 대공분실도 따돌렸는데, 그러다 보니 저절로 피신생활이 되었다. 공식적으로 수배를 받아 피신생활을 한 것은 아니어서 오히려 어정쩡한 면이 많았다.
74년 봄 투쟁을 준비하기 위해 많은 사람을 만났는데 다들 너무나 적극적이어서 누구를 설득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특히 '10ㆍ2 시위'를 반대했던 사람들이 더 적극적이었다. 나는 특히 동향 후배로 서울상대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병곤을 자주 만났는데, 그는 서울 문리대의 유인태, 이철, 나병식 등과 함께 74년 봄 투쟁을 조직적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1974년에 접어들자 박 정권은 민주화운동을 본격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1월 초 긴급조치 1호와 2호를 발동하여 헌법개정과 관련한 일체의 행위를 금지하고, 이에 위반하는 경우 중형에 처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아버님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집으로 갔다. 비록 피신생활을 했지만 공식적으로 수배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집에 간다고 해서 금방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았다. 아버님은 배가 편찮으셔서 돌아가셨는데, 내가 집에 가고서 일주일만이었다. 치료도 한 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이 너무나 후회스럽고 또 죄스럽다.
살아계실 때 한 번도 효도될 만한 일은 해보지 못하고 오히려 불효될 만한 일만 골라서 한 처지라 가슴이 미어졌다. 그러나 임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장례를 치르자마자 서울로 돌아왔는데, 어머니가 어떻게 살아가실까 싶어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민청학련사건이 터져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박정희 정권은 학생운동에 대해 사형, 무기 등에 해당하는 중형을 선고하겠다고 선언했다. 비록 그것이 엄포일지라도 세상을 얼어붙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나는 민청학련사건의 배후조종자로 지명 수배됐는데, 특히 김병곤에게 써준 '민중의 소리'가 문제가 되었다. 한동안 김지하의 작품으로 보도되어 수사과정에서 그렇게 되었나 보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수사결과 발표에서 내가 쓴 것으로 밝힘과 동시에 민청학련사건을 좌경용공으로 모는데 이 글을 무척 많이 이용했다.
특히 이 글의 내용으로 보아 우리사회에 '자생적 공산주의자'가 나타났다고 야단법석이었다. '자생적 공산주의자'로 몰아서는 처벌하기가 오히려 어려울 것 같은데도 '자생적 공산주의자'로 규정한 것은 그만큼 마르크스 레닌주의나 북한의 주체사상과 관련 짓기가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만 본다면 상당히 공정한 판단이었다.
어쨌든 나는 '자생적 공산주의자'라는 말이 무척 흥미로웠다. 나의 이념적 정체성을 상당히 정확히 표현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상식적 의미의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는 아니지만 그런 성향을 지닌 것은 분명하고, 또 그것이 '타생적'이기보다 '자생적'이라고 할 만한 하기 때문이다.
또 다시 본격적인 피신생활을 해야 했다. 이소선 어머니가 소개한 집에서 나와 경기도 광명리의 한 월셋방으로 옮겼다. 이소선 어머니와 함께 약간의 짐 보따리를 들고 택시를 타러 대로로 나오는데 이소선 어머니가 담당형사를 보게 되었다.
갑자기 짐을 나에게 넘겨주고는 혼자 걸어갔다. 나더러 알아서 택시를 타고 가라는 눈치였다. 이소선 어머니와 반대 방향으로 걷다가 택시를 타고 왔는데, 나중에 들으니 이소선 어머니는 그 담당형사와 상당한 실랑이를 벌였다고 했다. 사실 피신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온갖 일을 겪게 된다.
광명리에 도착했는데, 모두가 나를 응시하는 것만 같았다. 안경을 쓰고 머리모양을 바꾸는 등 최대한의 변장에다 공장노동자답게 옷을 차려입었지만, 그런다고 안전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자취방을 드나드는 데 엄청나게 신경을 써야 했다.
그런데 피신생활을 하는 경우 초기에는 만나는 사람이 더러 있으나 나중에는 극히 제한된 사람만 만나게 되어 하루 종일 혼자 지내는 때가 많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낮에 지낼 곳을 마련해야 했다.
나는 최대한 주위를 살피고 또 살핀 다음 사설독서실에서 낮 시간을 보내면서 점심시간에는 근방에 있는 태권도장에 나가 젊은 사범의 청소일을 도와주며 한 두 시간 운동을 하며 지냈다. 언제라도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었음은 물론이고.
피신생활에도 상당한 돈이 드는데, 이 때는 김근태의 도움을 받았다. 김형은 회사에 다니면서 받은 돈으로 매월 나의 생활비를 대주었는데, 덕분에 나는 상당 기간 돈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었다. 김근태가 아니었다면 누가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