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루저' 파문으로 세상이 떠들썩한데, 그렇다면 저는 완벽한 조건을 갖춘 최상급 루저입니다. 하지만 저는 군대도 다녀오고 위장전입도 한 번 안하고 성실하게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피해보는 세상은 잘못된 세상이라는 이야기, 그리고 성공했다는 사람들이 만든 세상이 허위로 가득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가난밖에 없는 빈농 집안의 셋째 아들, 중학교 중퇴, 열네 살 때부터 일식집 주방보조, 공사판 잡부, 벽돌공, 중국집 배달원, 술집 지배인 등 수십 가지의 밑바닥 직업 전전, 몇 차례의 전과…. 1991년 계간 창작과비평에 '목수'라는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한 유용주(50)씨의 삶의 이력은 '문학이란 패배자의 것'이라는 명제를 웅변할 만하다.
시나 소설은 아니었지만 가난한 노동의 현장에서 삶과 맨몸으로 부딪히며, 고통을 더 큰 고통으로 이겨내는 과정을 담은 그의 산문집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 (2002)는 수십만 부가 팔리며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유씨의 새 장편소설 <어느 잡범에 대한 수사보고> 는 그가 시인에서 소설가 겸업을 선언하며 냈던 성장소설 <마린을 찾아서> (2001)의 후속편 격인 자전소설이다. 2002년 한 일간지에 연재했던 작품으로 7년 만에 책으로 묶었다. 중학교에 올라간 딸의 뒷바라지를 해야했고, 새벽같이 출근하는 초등학교 교사인 아내를 내조하느라 그동안 원고 개작에 손을 대지 못했다는 것이 책이 늦어진 데 대한 유씨의 변. 마린을> 어느>
소설은 세상과 격리된 군대와 교도소라는 공간을 무대로 우리 사회의 최하층 인생들이 깨어지고 부서지고 좌절하지만 결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동안 묵혀 있었던 원고가 "부자 정권"이 출범하고서야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은 "우연치고는 묘한 우연"이라고 유씨는 말했다.
주인공은 우유배달원이자 지역 문학잡지에 시도 싣는 소시민 김호식이다. 술에 취해 길가던 시민을 때리고 출동한 경찰들까지 박살을 내 붙잡혀온 김호식이 늙은 형사에게 털어놓는 험난했던 인생역정이 펼쳐진다. 1980년대초 살벌한 사회적 분위기와 물리적 폭력이 제어되지 않는 군 내부 풍경, 인간이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군 형무소의 속사정 등은 모두 작가의 직접 체험에 기반한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 에서부터 황석영의 <어둠의 자식들> 에 이르기까지 수용소, 형무소, 군대 같은 폐쇄적 공간을 소재로 한 소설들은 대체로 무겁고 어둡다. "세상에, 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리라."(263쪽) "법이 힘있는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유리하고, 힘없는 사람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불리하게 적용된다면 그 법을 법이라고 말할 수 있겠어요? 그런 법이라면 지킬 필요가 없겠지요"(225쪽) 어둠의> 죽음의>
이런 구절처럼 <어느 잡범에 대한 수사보고> 에는 가진 것 없는 자들의 고통과 슬픔, 세상에 대한 분노가 절절하게 배어있다. "책에 '19금'의 빨간 딱지를 붙여야겠다"는 작가의 농담처럼 거친 욕설과 노골적인 육담이 빚어내는 유용주식 글쓰기에는 그러나 진창을 구르며 고통을 견뎌낸 한 인간이 품게 된 희망과 낙관의 아우라도 동시에 발산된다. 어느>
작가에게 자기모멸의 시간을 견디며 분신 같은 김호식으로 하여금 "가장 밑바닥인 이곳에서, 짐승 취급을 받는 이곳에서 살아남아, 이 바닥을 증거해야 한다"는 삶의 의지를 다지게한 것은 다름아닌 문학이고 시였다. 유씨는 기자간담회에서 "시인지 소설인지 감당하지 못할 때까지 밀고 가겠다"고 말했다. 가령 고참들에게 무시무시한 구타를 당한 뒤 솟구치는 주인공의 처연한 슬픔을 묘사한 이 소설의 한 대목은 그의 말이 허언이 아닐 것임을 보여주는 듯하다.
"초롱초롱한 별이, 맑게 얼굴을 씻은 달이 현장을 지켜봤다. 소쩍새가 울었다. 휘파람새가 길게 울면 백운봉에서 남한강 쪽으로 꼬리별이 길게 미끄러지면서 소멸했다. 밤새 자신을 태운 별똥별은 새벽이 되면 안개로 변해 뭉클뭉클 산중턱까지 올라올 것이다. 물안개는 소리 없이 그 부드러운 손을 넓게 펴서 몸과 마음이 망가져가는 푸른 육신을 감싸 안아 쓰다듬어 줄 것이다."
이왕구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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