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이다, 갈겨… 윽" 죽은 내 몸뚱이에 땀방울이 솟구친다
11시 방향 20m 전방. 나뭇가지 사이로 인영(人影)이 어렴풋했다.
검은색 가슴 보호대를 한 적군이었다. 그는 아래쪽으로 총을 쏘아 대느라 기자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적이 들을까 숨을 죽였다. 바닥에 엎드린 채 가늠쇠로 적군의 머리를 조준, 페인트탄 두 발을 날렸다. 앗, 빗나갔다. 위치가 노출됐다.
'젠장.' 탄알이 빗발쳤다. 잰 걸음으로 드럼통 뒤에 숨었지만 아래쪽에서 쏘아 대는 탄알은 피할 도리가 없었다. 9시 방향 참호까지는 5m 남짓. 엎드린 채 왼쪽으로 두어 바퀴를 굴러 피신에 성공했다.
조금 전 운 좋게도 목숨을 건진 적군은 기자가 아직 드럼통 뒤에 숨은 줄 아는지 지그재그로 뛰어왔다. 무방비 상태. 방아쇠를 빠르게 두 번 당겼다. 한 발은 아깝게 빗나갔지만 두 번째 탄알이 머리에 명중했다.
이제 남은 적군은 2명. 그들은 10시 방향 참호에 있는 아군과의 교전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작전 목표인 깃발까지는 불과 10여m. 용수철 튕기듯 참호에서 뛰어나와 깃발을 향해 안간힘을 다해 뛰었다. 아뿔싸, 적군이 한 명 더 있었다.
깃발 뒤에 숨어 있던 적군은 기다렸다는 듯 탄알을 쏘아 댔다. 오른쪽 옆구리와 왼쪽 어깨에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머리와 가슴은 1발, 다른 부분은 2발 맞으면 사망인데 도대체 몇 번을 죽이는 거냐'라며 원망하고 있는데 안면 보호대에도 한 발 날아와 꽂혔다.
노란 물감이 흘러내려 앞이 보이지 않았다. 두 손을 들어 사망을 인정했다. 기자를 엄호하던 마지막 생존자도 적들의 집중 사격에 두 손을 들었다. 깃발 쟁탈전은 아군의 패배로 끝났다.
사내라면 어릴 적 골목 귀퉁이 전봇대며 리어카, 입간판 따위에 몸을 숨겼다가 입으로 '빵' 소리를 내며 뛰어다녔던 추억 한 가닥씩은 갖고 있을 게다. 플라스틱 빗자루를 거꾸로 들면 총, 돌멩이는 수류탄이었다.
아련한 추억을 찾아 기자는 23일 경기 파주시 탄현면 금산리 팡팡체험스쿨을 찾았다. 자유로 성동IC를 빠져나와 첫 번째 사거리서 좌회전한 뒤 헤이리 문화예술마을을 지나 2.5㎞ 더 들어간 곳이다.
뱀처럼 굽은 농로를 따라 들어갔다. 거대한 소가 머리를 왼쪽으로 두고 기자 쪽으로 다리를 뻗은 채 옆으로 누운 형태의 능선이 펼쳐졌다. 이날 전투를 치를 초보자용 전투장은 소의 앞 발에서 어깨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다소 경사가 급했다.
면적은 1,600㎡, 한 변의 길이가 40m쯤 되는 정사각형이다. 오른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소의 넓적다리에 해당하는 아동용 전투장(1,300㎡), 소 꼬리에서 엉치까지 펼쳐진 중ㆍ고급자용 전투장(3,300㎡)이 눈에 들어왔다.
아동용에서 초보자, 중ㆍ고급자용으로 갈수록 나무가 빽빽한 대신, 드럼통 모래주머니 같은 인공 은폐물이 적다. 수준이 높을수록 자연에 가까운 지형에서 전투를 치르는 셈이다.
깃발 쟁탈전 후 잠시 휴식시간. 전투를 함께 했던 파주고 파주공고 3학년 학생 일곱 명, 차민준(25) 조교 등과 인사를 나눴다. 10여분 간 생사를 함께한 전우라고 스스럼없었다. 아군과 적군의 구분도 없었다. 이들은 모두 최소 1년 이상의 경력자다.
이번 전투는 전멸전. 블랙팀과 레드팀 둘 중 한 팀이 모두 죽어야 끝나는 경기다. 이벌게임 3년 경력의 정지선(26)씨가 작전을 하달했다.
"내가 의균이 하고 중앙에서 엄호할 테니 중권이하고 형일이는 각각 좌우에서 5m 전방 참호까지 무조건 뛰어. 기자님도 오른쪽으로 돌파하세요."
호루라기 소리를 신호로 전투가 시작됐다. 적군이 머리를 들지 못하도록 아군이 엄호하는 틈을 타 재빨리 전방 참호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러나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었다. 쏟아지는 탄을 피하는 동안 적군들은 아군 진영을 갉아먹듯 다가왔다. 모래주머니 위로 눈만 내놓은 채 엄호밖에 할 수 없는 상황. 11시 방향에서 겁 없이 뛰어가는 적군을 사살했다. 자신감을 얻은 기자.
그러나 무차별 사격을 감행한 것이 화근이었다. 열심히 방아쇠를 당기는데 탄알이 나가지 않았다. 탄통이 비었다. 서바이벌 게임에서 탄알이 떨어지면 사망으로 간주한다. 두 손을 들고 경기장 밖으로 나가는 동안 아군 2명이 잇따라 전사했다. 또 졌다.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기자에게 블랙팀 홍택기(파주공고3) 학생이 말을 걸었다.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다음에 이기면 되잖아요." 열여덟 홍안의 소년에게 승패병가상사(勝敗兵家常事)를 배웠다.
파주= 허정헌기자 xscope@hk.co.kr
■ 서바이벌 게임, 운동화만 준비하시라
서바이벌 게임은 1970년대 미국에서 시작했다.
인라인 스케이트에 이어 현재 미국 내 레저ㆍ스포츠용품 판매액 2위를 달릴 정도로 인기를 얻고 있다. 한국에는 80년대 말 도입됐고 정기적으로 경기를 갖는 동호인은 1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도입된 지 20여 년이 된 만큼 국내 서바이벌 게임장은 60곳을 넘을 정도로 많다. 하지만 안전 장비를 갖추고 전문 교관이 상주하는 전문 업체는 많지 않다.
전문가들은 경기 파주시 탄현면의 팡팡체험스쿨(www.ppevent.kr), 강원 철원군 갈말읍 한솔레포츠(www.hansolleports.co.kr), 강원 춘천시 남산면 원코리아 하이레저(www.hileisure.net), 경기 용인시 고림동 케이투서바이벌(www.k2survival.co.kr) 등을 추천했다.
굿레저(www.goodleisure.co.kr)는 경기 강원 충청 호남 등 권역별로 20여 개 교장을 운영하고 있다.
서바이벌 게임의 종류는 다양하다. 상대팀을 모두 제압하는 전멸전, 진지를 탈환하는 진지전, 상대팀의 깃발을 빼앗는 깃발전 등이 기본 경기다.
응용 경기로는 팀원 중 1명을 위생병으로 해 전사자를 되살리는 위생병전, 포로 구출전 등이 있다. 인원 구성도 전투장 규모에 따라 최소 3명에서 수십 명까지 편성할 수 있다.
연인끼리 경기하고 싶다면 2명씩 3개 팀으로 나눠 전투를 벌이는 샌드위치전도 가능하다. 노우찬 팡팡체험스쿨 대표는 "혼자 오면 다른 사람과 팀을 이루고, 여러 명이 오면 팀을 나눠 즐길 수 있어 사실상 인원 제한은 없다"며 "인원 구성을 위해 사전 예약은 필수"라고 말했다.
서바이벌 게임을 하려면 운동화만 준비하면 된다. 대부분 업체들이 총, 마스크, 가슴 보호대 등 기본 장비뿐 아니라 전투복도 대여해 주기 때문.
노 대표는 다만 "체격이 정상인보다 많이 크거나 작은 사람, 어린이는 준비된 옷이 맞지 않을 수 있으니 갈아 입을 옷을 준비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 비용은 전투 3회를 기준으로 3만원대, 소요 시간은 전투당 10분 안팎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이상이면 누구나 즐길 수 있다.
허정헌 기자 xsco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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