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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순천 조계산 굴목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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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순천 조계산 굴목이재

입력
2009.11.26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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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 땅을 지나는데 차창 밖으로 눈발이 날렸다.

이렇게 무심히 겨울을 맞는 걸까. 이대로 가을을 보낼 수 없었는데…. 가속기를 밟은 발에 힘이 더 들어갔다. 드넓은 순천만 가득 만추를 붙잡고 있을 것 같은 전남 순천시로 마음이 먼저 달려갔다.

선암사주차장에 도착해선 트레킹 채비를 하고 선암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손이 시리고 귀가 차가운걸 보니 어느덧 이곳에도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길 옆을 흐르는 물소리에서도 추위가 묻어났다. 절로 이어진 낙엽길엔 5월에 달았을 부처님오신날 연등이 여전히 걸려 있다.

불빛 꺼진 연등은 대신 새카만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다. 고개를 들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채 떨어지지 않는 나뭇잎 몇 장이 안타까이 가을을 붙들고 있다.

아름다운 돌다리 승선교를 지나 선암사로 올랐다. 강선대 아래의 계곡 물이 이상하리만큼 탁했다. 이윽고 도착한 사찰. 또 중창불사의 망치질 소리가 퍼지고 있다.

수년간 이곳에 올 때마다 공사 소리가 들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절이 반듯해진다는 생각보다 절이 점점 망가져 간다는 느낌에 마음이 불편했다. 돌담에 기댄 선암매의 메마른 가지가 더욱 처량해 보였다.

절을 빠져 나와 굴목이재로 들어섰다. 선암사 부도탑을 지나 조금 오르니 금세 호젓한 숲길이다. 깊은 숲은 새들의 천국이다.

새들이 조잘거리는 소리는 봄의 느낌이다. 맑고 가볍다. 선암사의 점심 공양 징소리를 들었는지 저들도 끼니때가 된 것 마냥 부산스럽게 숲을 흔들어 댄다.

얼마 안가 조계산 생태체험야외학습장이 나타났다. 원두막 대여섯 개가 먼저 반긴다. 이곳의 울울창창한 편백나무숲이 장관이다. 잠시 지금의 계절을 잊는다. 초록의 그늘 속에 들어가 쭉 뻗은 나무 기둥들을 우러른다.

힘찬 숨 박동이 느껴지는 듯하다. 편백의 숲을 관통하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는다. 시원한 여름 숲에 온 것 같은 환각에 빠져든다. 초록의 숲향이 그윽했다.

굴목이재 길에서 이따금씩 만나는 낙옆 순례객들. 발끝에 채는 낙엽에만 온 신경을 곤두세우곤 묵묵히 걸음을 옮긴다.

숯 가마터를 지나면서 길은 계속 오르막이다. 돌계단과 낙엽이 어우러졌다. 낙엽의 빛깔이 정갈하다. 구도의 빛이다.

차츰 '구도의 고갯길'이 힘들어졌다. 편안한 코스인줄만 알았는데 고행이다. 모든 깨달음엔 이렇게 수고로움이 동반돼야만 하는 걸까. 심장의 울림이 절정에 달했을 때다. 드디어 선암굴목이재 꼭대기에 올랐다.

건너편에서 올라온 이들이 먼저 능선의 큰 바위를 점하고 있었다. "고생 끝 행복 시작입니다."덕담을 건네 주신다. 과일이나 한 조각 하고 가라 붙잡는 것을 말씀만으로도 고맙다며 정중히 사양하곤 쉬지도 않고 내리막을 내달렸다. 고개 아래에 있는 보리밥집에 하시라도 빨리 가고 싶은 마음에서다.

조계산을 타는 게 이 보리밥을 먹기 위해서 란 사람이 많을 정도로 이름난 굴목이재의 보리밥집. 동그란 양은 쟁반에 각종 나물과 채소가 가득한 밥상이 차려졌다.

막걸리 한 잔도 주문했다. 끼니 때도 한참 지났고 산길도 탔기에 배가 무척이나 고팠다. 하지만 손은 밥그릇보다 막걸리 사발로 먼저 갔다. "으아…" 바로 이 맛이다. 말갛게 흐르던 그 물소리 같고, 휑한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눈부시게 파란 하늘빛 같기도 한 그 시원함.

곰삭은 김치와 고소한 나물, 싱싱한 야채 하나하나가 맛나다. 큰 그릇에 한데 몰아 넣고 참기름에 고추장 넣고 쓱쓱 비벼 먹는다. 행복하단 느낌에 괜스레 입꼬리가 올라간다.

밥상을 물리고 평상에 잠시 앉아 있는데 그새 땀이 식는다. 몸이 차가워지기 전에 걸음을 재촉했다. 햇빛이 사선으로 누우며 낙엽 길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무표정의 낙엽 카펫이 반짝거린다. 미소를 짓는 듯, 두런두런 수다를 떠는 듯 굴목이재길이 바스락거린다.

또 만난 고개인 송광굴목이재는 선암굴목이재 만큼 높지 않았다. 고갯마루에서 송광사까지 거리는 2.5km. 고개를 내려가니 제법 굵은 물줄기와 만났다.

계곡의 넓은 암반 위를 낙엽이 가득 덮었고 떨어진 이파리 사이로 물줄기가 S자로 휘어져 흘렀다. 그곳에 말간 가을이 흐르고 있었다.

■ 여행수첩

서울에서 순천시 선암사까지는 경부고속도로 천안논산고속도로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장성JC에서 고창담양고속도로로 갈아타고는 다시 창평JC에서 남해고속도로를 탄 뒤 승주IC에서 빠져나온다. 지방도 857호선을 타고 약 8km 가량 가면 선암사주차장이다.

선암사에서 송광사까지 이르는 굴목이재 길 길이는 6.7km. 보리밥집에서의 점심식사 등을 포함해 넉넉히 5시간은 잡아야 한다. 절을 둘러보려면 한두 시간 더 잡아야 한다.

선암사와 송광사 앞에 식당을 겸하는 여관이나 민박집들이 많이 있다. 선암사와 인근한 낙안읍성에서의 하룻밤도 추천할 만하다. 전통 초가집에서 민박이 가능하다.

송광사에서 선암사로 다시 오려면 순천행 시내버스를 타고 승주까지 가서 다시 선암사로 가는 시내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시간이 급하면 송광사 아래에 항시 대기하고 있는 콜택시를 이용할 수도 있다. 요금은 3만원을 받는다. 송광사 택시 (061)755_2525

굴목이재 보리밥집의 보리밥 가격은 5,000원. 큰 사발에 나오는 막걸리 한 잔은 2,000원이다. 야채전(5,000원)과 도토리묵(5,000원)도 맛볼 수 있다. (061)754_3756

조계산(순천)= 글ㆍ사진 이성원 기자 sungwon@hk.co.kr

■ 순천시 조계산

순천시의 조계산은 태고총림의 선암사와 조계총림의 송광사를 품고 있다. 둘 다 각 종파의 으뜸 사찰이다.

동쪽 기슭의 선암사는 봄이면 청매 홍매가 꽃망울을 맺기 시작하면서 화려한 꽃사태를 펼쳐 낸다. 백제 성왕(529년) 때 아도화상이 지은 천년고찰 선암사는 많은 선승을 배출했다. 산사의 고즈넉함과 고풍스러움을 찾아 많은 이들이 찾는다.

선암사의 토종 매화인 선암매만큼이나 이 절에서 유명한 것은 '뒤깐'이다. 우리나라 사찰 재래식 화장실 중에서 가장 깊고 아름다워 지방문화재로도 지정된 건물이다. 몸 속의 오물과 함께 마음의 욕심까지 버리고 가는 곳이다. 절 뒤편엔 수백 년을 이어 온 야생차밭이 있다.

대웅전 등 목조건물은 대게 조선 후기의 것이다. 조선 숙종 때 건설한 승선교와 대웅전 앞 두 개의 삼층석탑, 대각국사진영 등 보물 8점이 있다.

선암사에서 굴목이재길을 타고 가서 만나는 송광사는 법보사찰인 해인사와 불보사찰인 통도사와함께 삼보사찰을 이루는 승보사찰이다.

보조국사 진각국사 등 16명의 국사를 배출한 대사찰이다. 송광사의 이름 높은 스님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가 지눌이다. 1190년 지눌 스님은 불교 쇄신 운동인 정혜결사 운동을 이곳 송광사에서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이후 자신을 포함한 16국사가 이 절에서 배출된다.

많은 건물들이 6ㆍ25전쟁 통에 불탔지만 16국사의 영정을 모시는 국사전과 목조삼존불감, 고종제서 등 국보 3점을 포함해 32점의 문화재가 보존돼 있다. 쌀 7가마 분량의 밥(4,000인분)을 담을 수 있다는 대형 밥통 비사리구시도 볼 만하다.

굴목이재길 코스 중 송광굴목이재에서 샛길로 접어들면 송광사에 딸린 암자인 천자암에 이른다. 이곳엔 800년 넘은 두 그루의 곱향나무(높이 13mㆍ천연기념물 88호)가 자란다. 두 마리의 용이 솟구쳐 오르는 듯한 나무의 모습이 영험스럽다. 나무의 주름진 기둥에서 세월의 무게를 느낄 수 있다.

순천= 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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