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이 정부에 단단히 화가 났다. 정부가 중요한 정책을 당과 상의 없이 발표하는 경우가 잦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 지도부는 26일 정부의 일방적 태도를 비판하면서 "앞으로는 당과 사전에 상의하라"고 요구했다. 당정간 엇박자가 여과 없이 표출된 셈이다.
한나라당이 이번에 문제를 삼은 것은 두 가지다. 국민권익위원회(위원장 이재오)가 제한적 계좌추적권이라고 할 수 있는 '정보요구권' 도입을 추진하고, 미래기획위원회(위원장 곽승준)가 초등학교 입학연령을 1년 앞당기는 등의 저출산 대책을 발표한 것을 겨냥했다. 안상수 원내대표는 이날 최고위원회의에서 "정부는 중요 정책을 결정할 때 당과 사전 협의를 할 필요성이 있다"며 작심하고 정부를 비판했다.
안 원내대표는 "국민권익위원회의 계좌추적권 도입 추진과 미래기획위원회의 저출산 대책 등 두 사안은 모두 국가 백년대계를 위해 깊은 논의가 필요한 중요한 정책이고 국민 생활에도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이 같은 중요한 정책에 대해 정부와 청와대는 당과 사전 정책 조율을 거쳐 발표하는 것이 좋다"고 주문했다. 안 원내대표는 "그렇게 해야 정책 신뢰성을 높이고, 정치ㆍ사회적 논란을 막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덧붙였다.
안 원내대표는 또 "이명박 대통령이 미래기획위의 발표안은 확정된 게 아니고 토론 과제로 내놓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파급 효과가 큰 만큼 당과 사전조율을 거치는 게 타당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어진 비공개 회의에서도 안 원내대표는 주호영 특임장관에게 당정 협의 부재 문제점을 상기시키며 "청와대와 정부측에 재차 주지시켜 달라"고 촉구했다. 이에 주 장관은 "그렇게 하겠다"고 답변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당직자는 "회의 참석자 대부분이 안 원내대표의 문제 제기에 공감하는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당내에는 "안 그래도 세종시, 4대강 사업 등 대형 현안이 많은데 정부가 당과 상의 없이 국정 현안을 불쑥불쑥 내놓는 것은 문제"라는 비판의 소리들이 쏟아지고 있다.
한나라당이 강하게 정부측을 비판한 것은 비단 이번 일 때문만은 아니다. 10ㆍ28 재보선 직전 정부측이 당정협의를 거치지 않고 복수노조 허용 및 노조전임자 임금 금지 등 민감한 노동 현안을 이슈화한 것에 대해 당은 불만을 갖고 있다. 세종시 수정론이 정운찬 총리의 언급으로 인해 충분한 준비 없이 대형 이슈로 떠오른 데 대해서도 안타까워하고 있다.
상당수 여당 의원들은 "과거 정권에 비해 당정협의가 부족한 것 같다"고 지적한다. 그동안 쌓였던 불만들이 이번에 폭발했다고 할 수 있다. 한 원내 관계자는 "모든 정책은 입법이 뒷받침돼야 한다"며 "정부가 당과 논의하지 않고 정책을 추진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 '당이 정부의 뒤치닥거리를 하는 곳이냐'는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정녹용 기자 ltre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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