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2029년 정부는 드디어 지난 20 년 간의 분리주의 정책을 포기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로써 인간은 키에 관계없이 동등한 참정권을 지니게 됐으며, 거주지나 식당, 대중교통의 이용에 있어서도 키에 따른 제한은 철폐되었다. 야당인 자유루저당도 즉각 환영 성명을 발표했다. '세종대왕부터 이순신 장군, 안중근 의사까지 180cm 이하의 위인들이 목숨을 바쳐가며 지킨 이 나라를 일부 소수 장신자들이 독점한 지난 20 년은 우리 역사의 긴 암흑기였다'는 탄식이 그 성명의 첫머리였다.
방송이 '분리주의' 부추겨
정부는 실질적 정책으로 모든 공적 서류의 신상정보란에서 키에 관한 항목을 삭제했으며, '후리후리하다''늘씬하다''훤칠하다'등의 장신 미화적인 형용사들을 국어사전에서 삭제하기로 했다. 뿐만 아니라 하이힐, 키높이 구두, 깔창 등 장신인 듯 보이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지는 제품의 생산도 중단시켰다.
국제 사회에서도 잇따라 환영 성명이 나왔다. 21 세기 한국에서 느닷없이 출현한 이 새로운 형태의 인종주의에 대해 그 동안 국제사회는 깊은 우려를 표했다. 특히 미국이나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 인종주의의 상처를 역사 속에 갖고 있는 나라들의 우려는 훨씬 더 했다. 신체적 특성을 가지고 특권층이 형성되고 이에 따른 차별이 행해지는 한국의 상황은 인종이나 민족에 따른 차별이 사라져가는 인류의 미래를 위협할 수 있는 잠재적 요소로 받아들여졌다.
미국이나 유럽처럼 180cm를 넘는 사람들이 인구의 다수인 나라들과 그렇지 않은 아시아 나라들도 있어, 나라 별로 한국의 이 사태를 보는 관점은 다양하고 복잡했다. 180cm 이상 선수들로만 구성된 한국 대표팀의 월드컵 참가를 금지했던 국제축구협회도 환영의 뜻과 함께 한국의 월드컵 참가를 다시 허용한다고 발표했다. 협회는 '마라도나도 메시도, 심지어 박지성까지도 180cm가 안된다'는 말로 한국의 정책이 기술축구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고 비난해왔었다.
대다수 논객들은 이 한국형 분리주의의 시작을 2009년 한국의 방송 상황에서 찾았다. 당시 TV 방송에는 유난히 오락, 혹은 예능으로 분류되는 프로그램이 많았다. 대부분 유명 연예인들이 나와서 재미있는 이야기로 시청률을 올리려는 의도의 프로이다 보니 이야기들은 점점 더 자극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신체적인 약점을 조롱하는 말들이 넘쳐났다.
'뚱뚱하다''얼굴이 크다''다리가 짧다'같은 심한 말들은 오히려 점잖은 측에 속했다. '발육이 좋다''엉덩이가 탱탱하다'는 등의 좀 더 선정적인 말들도 아무렇지도 않게 나오더니 급기야 '꿀벅지'같은 낯 뜨거운 용어까지 등장한 마당에 180cm를 기준으로 승자와 패자를 나눈 어느 여대생만 온갖 비난을 혼자 뒤집어쓴 것은 어찌 보면 억울한 일이었다. 외모 지상주의는 바야흐로 유행이자 상식이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이를 계기로 승자들은 급속하게 자신들을 조직화해서 승자로서의 이권들을 챙겨나가기 시작한 것이고, 이것이 그 뒤 20 년 간 이어진 한국형 분리주의의 시작이었다.
차별의 파시즘 경계를
봉건 시대에서 근대 시민사회로의 이행의 핵심은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일로는 차별 받지 않는다는 합리성의 확립이었다.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신분, 인종, 민족 등은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것이기에 차별의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외모 또한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것이므로 차별의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이번 사태에서 얻은 소중한 교훈이었다. 그러나 어느 외신은 인류의 역사에서 차별의 파시즘은 어떤 우스꽝스러운 것을 이유로도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이 2029 년 한국의 사태를 보면서 얻는 더 큰 교훈이라고 전했다.
육상효 인하대 교수·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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