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에 감기는 뽕짝이 섬 허리를 간질인다. 밭 귀퉁이에 차린 쥐코밥상 위 막걸리는 인부의 손에 들려 넘실넘실 춤을 춘다.
트랙터가 흙을 할퀴면 삼(參)은 속살을 드러낸다. 도둑 잡을 양으로 밤새 밭을 지킨 경찰은 '농촌 일손 돕기' 차원으로, 아낙들은 용돈벌이 할 심산으로 삼을 캔다.
그 폼이 마실 나온 발걸음처럼 가볍다. 밭주인 윤충구(65)씨는 시원섭섭함을 술로 풀었는지 벌써 불콰하다.
그러나 15등급이나 되는 삼을 골라내는 선삼(選參)꾼들의 손놀림은 기계처럼 정갈하다. 한 사내의 눈빛도 매섭게 빛난다.
"왕대(최고등급)가 많을 줄 알았는데 아니네." 연근(몇 년 근인지) 확인서와 이력관리 서류를 꼼꼼히 따지더니 캐온 삼을 요모조모 살핀다. 모진 시어미가 따로 없다. 24일 인천 강화군 양도면 삼흥(三興)리의 인삼 가을걷이 현장은 나른함 속에 절도가 묻어났다.
부흥을 꿈꾸는 고려인삼의 적통?
사내는 자신을 '강개상인'(상표등록도 함)이라고 소개했다. 개성의 인삼재배 비법과 송상(松商)의 상도(商道)를 강화에서 재현하겠다는 뜻.
강개상인 윤청광 ㈜삼흥(參興) 대표의 설명은 이랬다. 고려인삼은 개성 산을 으뜸으로 쳤는데, 구한말부터 한국전쟁까지 개성의 인삼 장인들이 어지러운 정세를 피해 강화도로 넘어왔다는 것.
인삼의 효능을 좌우하는 위도(보통 38도를 최고로 친다)가 개성(37.59도)과 비슷한데다(강화 37.45도) 자연환경도 닮았기 때문이다. 강화인삼이 개성인삼의 맥을 이은 셈.
그 덕에 1970년대까지는 강화인삼이 금산인삼을 압도했다는 게 윤 대표의 회고다. "증조부부터 인삼을 재배했는데, 어릴 때만해도 강화 인구가 14만이 넘었어요(현재 7만이 안됨)." 그러나 재배지가 경기의 파주 평택 등지로 흩어지면서 강화인삼의 위세는 한풀 꺾였고, 빈 자리를 금산이 채웠다.
윤 대표는 12년 전 직장을 그만두고 강화인삼의 부흥을 위해 상인으로 나섰다. 인삼밭이 홍수에 쓸려간 충격에 숨진 선친을 생각하니 농민들이 애지중지 가꾼 인삼을 제 값 주고 사 소비자에겐 싸게 팔아야겠다는 소명도 생겼다.
현실은 의욕을 내팽개쳤다. 브랜드 파워도, 자금력도 없으니 시장의 7할을 차지하는 대형업체를 누를 재간이 없었다. 승패가 뻔한 싸움에서 윤 대표가 내건 슬로건은 '고백'(Go back)이었다.
미련한 강개상인
윤 대표는 옛 방식을 고수한다. 보통 홍삼제조업체는 수삼(생삼)을 한 번 찌고 한 번 말려 홍삼을 만드는데, 그는 5회 찌고 5회 말린다(5증5포). 또 열풍기로 건조하지 않고 해풍과 서리 이슬까지 머금은 채 햇빛으로 말린다. 남들은 열흘이면 끝날 일을 두 달 반이나 들인다.
삼밭을 일일이 확인하는 것도 그만의 고집. 밭의 상태와 생산물을 보고 어찌 찌고 말려야 하는지 고민한다. 매년 7월엔 샘플링분석 잔류농약검사를 하고, 9~10월엔 직접 산지를 돌며 현찰로 사온다.
덕분에 몇 단계를 거쳐 수매하는 다른 업체보다 가격이 10~30% 싸졌다. 품질도 밀리지 않는다. 그는 "사포닌과 고형분(농축 정도)뿐 아니라 Rg1과 Rb1성분의 합(면역증진 효능)도 타사 제품보다 높다"고 했다.
이 미련하고 고집불통인 상인을 알아보고 98년부터 거래를 해온 신세계는 지난해 강개상인을 '미래 동반성장 지속가능 협력회사' 1호로 선정했다.
그는 다음날(25일)도 좋은 삼을 찾아 산지로 떠났다. 사무실엔 족자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견리사의.'(見利思義ㆍ눈 앞의 이익을 보거든 먼저 의를 생각하라)
강화=글ㆍ사진 고찬유 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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