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직은…" 리스크 관리가 최우선
해외 차입선들은 하루가 다르게 상환압박의 강도를 높였다.
1997년 외환위기 전야 때보다 상황은 더 심각해 보였다.
아침 저녁으로 열리는 유동성 점검회의. 시차 탓에 낮에는 아시아쪽 은행들, 밤에는 미국과 유럽쪽 은행들과 전화통에 매달려야 했다. 만기 좀 연장(롤오버)해달라고!
글로벌 금융위기가 엄습했던 작년 10월 국내 시중은행 자금부의 풍경이다. 한 자금부장은 "정말로 암담했다"고 당시를 회생했다.
물론 1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180도 달라졌다. 요즘은 시중은행 자금부장 모임에서 "외화를 어떻게 운용할까"고민할 정도로 자금사정이 좋아졌다고 한다. 그는 "외화유동성의 선제적 리스크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고 장 부장은 말했다.
건전성지표, 크게 개선됐지만
현재 국내은행의 건전성 지표는 1년전과는 판이하다. 대표적 잣대인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은 9월 말 현재 은행권 평균 14.07%. 두 분기 연속 사상 최고치다. 작년 10.86% 근처까지 떨어졌던 것에 비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지난해 외신들이 국내 은행의 큰 문제점으로 지적했던 예대율(예금 대비 대출비율)도 좋아졌다. 예대율이 높다는 것은 적은 돈으로 너무 많은 대출을 해줬다는 뜻.
지난해 8월 예대율은 124.7%에 달했지만 올해 6월 말에는 114.1%로 낮아졌고, 양도성예금증서(CD)를 포함하면 아예 100% 미만으로 떨어진 상태다.
외화조달도 잘 된다. 그 동안 은행들이 단기로 돈을 빌려 장기로 빌려준 탓(미스 매치)에 지난해 외화유동성 위기가 왔지만, 올 들어선 감독당국의 지도로 중장기 차입비율이 높아져 만기구조가 안정을 되찾고 있다.
하지만 이게 '위기의 안전판'은 아니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특히 BIS는 물론 각종 국제금융기구들이 본격적으로 은행의 건전성 지표와 규제 강화 방안을 논의하고 있어, BIS자기자본비율이나 예대율 등에만 의존했다가는 낭패를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나마 지금의 건전성은 언제라도 주저앉을 수 있다. 만약 '통 큰' 만기연장ㆍ신용보증조치로 숨겨졌던 중소기업 부실이 내년 이후 드러날 경우, 은행건전성은 다시 추락할 소지가 있다.
전효찬 삼성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연초 중소기업의 대출에 무조건 만기연장을 해 줬는데, 이제는 유동성 위기는 어느 정도 지나간 만큼 구조조정 문제가 불거질 것"이라면서 대출 부실에 대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결국 총체적인 리스크 관리 능력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리스크 관리, CEO 마인드가 가장 중요
위기 이후 국내 은행들은 올 경영 초점을 확장에서 내실로 전환했다. 신상훈 신한금융지주 사장은 지난 9월 직원들에게 "솥을 너무 많이 채우면 무게 때문에 솥발이 부러져 내용물을 모두 버리게 된다"며 양적 성장보다 내실과 리스크 관리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리스크 관리의 핵심은 'CEO 마인드'라고 강조한다. 신민영 LG경제연구원 금융연구실장은 "일반적으로 리스크 관리부서는 돈을 버는 부서가 아닌 비용이 드는 부서로 인식된다"면서 "CEO가 사세를 키우는 데 관심이 많으면 당연히 무관심해진다"고 지적했다.
선진 리스크관리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은 최고경영자의 '리스크 관리 마인드' 유무에 의해 결정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금융당국 고위관계자는 "은행은 리스크 테이킹(위험감수)을 하는 곳이 아니라, 리스크 매니지먼트(위험관리)를 하는 곳이라는 점을 절대 잊어선 안된다"고 말했다.
서병호 금융연구원 연구원은 "은행의 수익성을 평가하는 지표로 자기자본이익률(ROE)이나 총자산대비이익률(ROA) 등을 사용하는데, 내부적으로 지점 등에 대해 이를 측정할 때 리스크를 감안해 산출하고, 직원의 인사 고과도 리스크를 감안해 산정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최진주 기자 pariscom@hk.co.kr
■ 전문가 제언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글로벌 은행들이 파산하거나 구제금융을 받아 간신히 명맥을 유지한 반면 국내 은행들은 외화유동성 위기를 제외하면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리스크 관리를 잘 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리스크를 아예 회피했기 때문이다. 파생상품 투자 등을 안 한 것도 철저한 리스크 분석을 통해 리스크가 높아서 안 한 것이 아니고 아예 몰라서 안 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안전한 주택담보대출만으로 수익을 내는 것도 한계가 있다. 다양한 리스크 측정 기법과 신용평가 기법 등을 개발해 리스크 관리 능력을 키워야 한다."
신민영 LG경제연구원 금융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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