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는 의정부와 육조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 체제를 통해 500년 간 유지됐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엄격하게 관리된 관인(官印) 제도가 있었다. 관인은 국정 운영의 과정을 기록한 관문서에 효력을 발생시키는 역할을 한 만큼 예조 산하에 제작 총괄 기관을 두고 제작ㆍ발급 절차를 철저히 관리했으며, 크기와 사용자 등을 '경국대전'에 자세히 명시했다. 또 위조자에게는 엄중한 처벌을 내렸다.
하지만 그간 조선시대의 관인은 대부분 문서에 찍힌 흔적으로만 보여졌을 뿐 그 실물을 볼 기회가 거의 없었고, 왕실 어보(御寶)에 가려 큰 관심을 끌지도 못했다. 국립고궁박물관에서 24일 개막한 '조선왕조의 관인'전은 조선에서 대한제국까지 이조, 성균관 등 71개 기관에서 사용했던 관인 160여 점과 관련 문서를 처음으로 선보이는 자리다. 조선시대의 관직 제도부터 사회상의 변화 양상까지 담고 있는 자료들이다.
조선의 관인은 대부분 동으로 제작됐으며 관청의 이름이 새겨진 관청인, 관직의 이름이 새겨진 관직인, 국왕의 결재 여부를 나타내거나 공문서의 서식을 나타내는 관인, 각종 패와 목제 물품에 불로 달구어 사용하는 낙인(烙印) 등으로 나뉜다.
전시는 육조의 관인을 소개하는 것으로 출발한다. 인재 선발을 담당한 이조에서 문관을 선발하고 임명할 때 사용한 '이조지인(吏曹之印)', 국가 재정을 맡은 호조에서 사용한 '호조지인(戶曹之印)', 무관의 인사와 국방과 관련한 문서에 찍은 '병조지인'(兵曹之印)' 등인데 이조지인과 호조지인은 눈에 띄게 닳아 가장 많이 사용됐음을 짐작케 한다. 관인의 크기는 품계가 낮아질수록 작아진다. '경국대전'은 1품 2촌9푼(7.95㎝)부터 6품 2촌1품(5.75㎝)까지 품계에 따른 규격을 정해놓았고, 전시장에 나온 실물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관련 문서 중에도 흥미로운 것들이 많다. 조선 중기 학자인 우복 정경세(1563~1633)에게 시호를 내리는 과정에서 작성된 각종 문서를 연결한 '우복선생시장(愚伏先生諡狀)'은 예조지인, 봉상시인, 이조지인, 의정부인까지 다양한 관인들의 실례를 보여준다.
1888년(고종 25년)에 작성된 '안종하 임명장'은 위조 문서다. '안종하에게 화릉참봉의 벼슬을 내린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해당 관청인 이조의 관인이 있어야 할 자리에 어처구니없게도 어보가 찍혀있다. '관인을 위조한 자는 참형에 처하고 처자는 노비로 삼는다'는 엄격한 처벌 규정도 위조를 막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근대기에 들어서면 관인의 변화가 뚜렷하다. 갑오개혁 때의 대대적 관제 개혁에 따라 새로운 관인이 잇따라 제작됐는데, 크기가 눈에 띄게 작아지면서 현대식 도장의 형태도 나타났다. 대한제국의 황실 사무를 맡아보던 황후궁 수장의 관인, 강제 퇴위된 고종의 의복과 물품 조달을 관리한 승녕부에서 사용한 관인, 경의선 철도를 자체적으로 놓기 위해 설치됐다가 일본의 군용철도 부설로 폐지된 서북철도국 총재의 인장,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 접대를 담당한 접응관의 관인 등은 과거 역사를 고스란히 증언한다. 전시는 2월 15일까지 계속되며, 12월 11일, 내년 1월 8일에는 강연회도 열린다.
김지원 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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