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 갑자기 아버지의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 자식에게 찾아온다. 그것이 자식의 운명이다. 인생은 꼭 그렇게 힘들어야 하는 건가, 하는 의문도 없이. 불만도 연민도 없이. 말도 논리도 없이. 글썽거리는 눈물 따위 없이. 단 한 순간에."(소설가 한강 '아버지가 지금, 책상 앞에 앉아계신다'에서)
'어머니'라는 단어가 사랑, 숭고, 헌신과 같은 가치를 즉각 떠올리게 한다면 '아버지'라는 단어는 많은 자식들을 머뭇거리게 한다. 요즘에야 자녀들을 살갑게 대하는 아버지들도 많아졌지만 엄부자친(嚴父慈親)이라는 유교적 덕목이 미덕으로 여겨지던 지난 시절, 말이 없고 권위적인 아버지들은 가까이 하고 싶으나 좀체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존재이기도 했다.
<아버지, 그리운 당신> (서정시학 발행)은 문인들이 쓴 아버지 이야기, 또는 문인을 아버지로 둔 자녀들이 쓴 아버지 이야기를 묶은 산문집이다. 계간 '대산문화'에 2005년 여름호부터 연재된 글을 중심으로 36편의 '사부곡'을 한 자리에 모았다. 3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1부는 소설가 황순원-시인 황동규, 아동문학가 마해송-시인 마종기, 소설가 한승원-소설가 한강 등 아버지와 자녀가 모두 문인인 집안의 글, 2부는 김광섭, 유치환, 박태원 등 근대문학사에 큰 자취를 남긴 문인의 자녀들의 글, 3부는 소설가 박범신 서하진 정지아 김애란, 시인 신달자 정호승 등 현재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문인들이 회고하는 아버지 이야기다. 아버지,>
과묵하고 감정표현이 없는 아버지, 피곤한 아버지, 폭언과 폭력을 일삼았던 아버지, 주말이면 자녀를 태우고 드라이브를 하는 아버지 등 이들이 떠올리는 아버지 상은 다양하다. 아버지와 아들이 문학이라는 같은 길을 걸은 경우에도 그 아들이 떠올리는 아버지 상은 사뭇 다르다. 계간지로부터 아버지 황순원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원고청탁 전화를 받고는 단호히 못쓰겠다고 거절했다가, 6개월 만에 글을 썼다는 황동규 시인의 아버지에 대한 회고에서는 팽팽한 긴장감마저 느껴진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은 한 집에서 살며 체험을 너무 많이 공유하기 때문에 둘 다 자신만의 세계를 이룩하기가 힘들다"며 평소 아버지 이야기를 꺼렸던 이유를 털어놓았다. 산문을 전혀 쓰지 않고 문학책만 읽었던 아버지와, 산문집을 다섯 권이나 내고 철학 종교학 사회학 책을 훨씬 더 읽은 자신의 차이를 되돌아보기도 한다.
반면 시인 마종기는 자신의 문학적 감수성을 풍부하게 해준 추억의 수원지로 아버지를 떠올린다. 방 한 칸에서 다섯 식구가 살아야 했던 가난한 피난 시절, 원고료가 생겼다고 한턱 내시겠다는 아버지의 말에 음식을 사주실까 기대했던 중학생인 그를 아버지 마해송이 데리고 간 곳은 슈베르트와 쇼팽의 음악이 흐르는 고전음악감상실이었다.
국내 추리소설의 비조로 꼽히는 <진주탑> <마인> 의 작가 김내성의 아들 김세헌 카이스트 교수가 털어놓는 일화도 재미있다. 그는 '웅대하고 치밀한 추리소설, 비논리적이고 어눌한 삶' 이라고 아버지의 일생을 정의한다. 그는 아버지 소설의 구성은 논리적이고 과학적이었지만 가정생활은 이율배반적이었다며, 꿈자리가 나쁘다고 초등학생이던 자신을 학교에 보내지 않아 출석률이 반을 조금 넘을 정도였다고 돌이켰다. 마인> 진주탑>
책을 엮은 곽효환 대산문화재단 사무국장은 "이 책에 나온 수많은 아버지들은 근대화 이후 수많은 격변을 가장 먼저 가장 온몸으로 받으면서 우리 사회와 가족을 지탱해온 존재들"이라며 "지금은 부재하거나 그림자만 드리운 채 관심 밖에 있는 아버지라는 존재를 새롭게 돌아보고 온전한 아버지의 자리를 매김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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