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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 칼럼 멀리, 그리고 깊이] 정죄, 용서, 성상(聖像)파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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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 칼럼 멀리, 그리고 깊이] 정죄, 용서, 성상(聖像)파괴

입력
2009.11.24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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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나쁜 사람이 있습니다. 나쁜 행위가 있고, 나쁜 공동체가 있고, 나쁜 문화가 있습니다. 이러한 판단을 하기 위해 대단한 윤리학적 천착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도덕적으로 온전한 인격이 되어야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상식적으로 우리는 일상의 어떤 것들을 '좋은'또는 '나쁜'것으로 나누어 판단하면서 삽니다.

물론 '상식'이란 불안합니다. 실증된 참이 일상화된 것을 상식이라 일컫기도 하지만 직관이나 감성과 같은 '불투명하고 불안정한, 그러나 편리한'앎이 그렇게 불리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자신의 이해관계를 준거로 직관이나 감성을 마구 휘두르면서 선악을 분간하게 되면 그 상황자체가 이미 폭력이고 파괴적인 '나쁜'것일 수밖에 없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테면 욕하고, 속이고, 훔치고, 빼앗고, 미워하고, 때리고, 죽이는 일들이 그릇된 것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자기가 그런 짓을 하는 경우에도 그것이 나쁜 짓인 줄은 압니다. 또 그것이 불가피한 행위였다든지, 오해라든지, 아니면 내 일이니 상관 말라고 강변할 수도 있지만 그러한 발언이 크고 높을수록 그가 얼마나 못된 사람인지를 사람들은 더 뚜렷하게 판단합니다. 도덕적 판단이 배워 이루어지는 것인지, 아니면 태어날 때부터 지니게 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사람살이를 보면 대체로 그러합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당연히 좋은 행위가 있고, 좋은 공동체가 있고, 좋은 문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적인 경험에서 나쁜 것을 읽어내듯 좋은 것도 읽어냅니다. 칭찬하고, 신뢰하고, 도와주고, 사랑하고, 어루만져주고, 생명을 살리는 일들을 '좋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그 둘이 언제나 함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그 둘 사이에서 선하려는, 그런데 악할 수밖에 없는, 그리고 악에서 빠져 나오려는데 선에 이르기가 쉽지 않은, 그러한 긴장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삶의 본디 모습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과정에서 선과 악의 관계가 보여주는 '힘의 겨룸'입니다. 선은 악을 응징하고 배제하기 위해 선 자체의 '힘'을 발휘합니다. 그런데 악도 다르지 않습니다. 선을 파괴하기 위해 마찬가지로 악 자체의 힘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선의 편에서 악을 넘어서려는 온갖 노력이 이루어져 왔습니다. 도덕이나 법은 이 계기에서 출현한 선의 지극한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힘은 일상에서 행위를 규제하여 아예 악이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합니다. 만약 그래도 벌어지는 악에 대해서는 일정한 규제와 징벌을 철저하게 과합니다. 물론 그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악을 마주하면서 선은 결연해야 합니다. 악은 그렇게 척결되어야 하고, 선은 그렇게 정의롭게 자기를 구현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마침내 삶은 좋은 것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해왔습니다. 현학적인 많은 논의들을 제 언어로 발언한다면 이러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러한 생각들이 한꺼번에 좌초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중간시험을 치던 어느 날입니다. 저는 제 과목의 시험 감독을 하고 있었습니다. 교육학적인 의미를 간과하고 말한다면 감독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선의 자리에서 악을 방어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한 학생이 '커닝'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에게 그 학생은 '나쁜 놈'이었습니다. 선하고 바른 자리에서 우리 모두를 위해 저 학생을 징벌해야겠다는 책임의식이 일었습니다. 그에게 조용히 다가가 답안지와 노트를 뺏었습니다. 저는 제가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자의식이 들었습니다. 악을 방지했고 배제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순간 제 '적발'에 의하여 소멸될 그 아이의 '선의 가능성'이 염려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이른바 정의(正義)가 늘 빠진다는 악에 대한 연민의 유혹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제 그 갈등은 절실했습니다. 어쩐지 잘못을 범하고 들켜 '무력해진'학생 앞에서 제가 그 학생 때문에 갑자기 선하고 정의로운 인간이 되어 우쭐거리는 치사한 인간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 학생은 시험지 답안을 위해 커닝한 것일 뿐이지만 저는 얼마나 많은 그러한 유혹 앞에서 이런저런 모습으로 넘어졌었는가 하는 데 생각이 이르자 적나라하게 드러난 제 몰골을 들키기나 한 것처럼 부끄러웠습니다. 저는 마침내 그를 제 연구실로 불러 답안지를 다시 작성하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말했습니다. '너는 나쁜 놈이야. 그러나 용서해 줄께!'

그런데 이 일을 통해 저는 용서란 선이 악에게 베푸는 '은총'이 아니라는 것을 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용서란 '공범자 의식'을 지니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못된 짓을 우리끼리 남모르게 해치우자면서 키득거리는 그러한 공범의식이 아니라 '너나 나나 다르지 않은데 우리 함께 이 악에서 벗어나자!'하는 의식이라고 말하면 전달이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른바 징벌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높고 귀한 곳에서 자신의 온전함과 선함의 권위에 장하여 악을 내치고 저주하는 것이 정죄가 아니라 '너나 나나 다르지 않은데 우리 함께 우리가 범한 잘못에 대한 벌을 받자!'는 것이 징벌의 참 모습이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한 자의식에서 비롯하지 않은 정죄란 비록 그것이 선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절대화하든가 신격화하는 오만한 행패와 그리 먼 거리에 있지 않은 것이리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잘못에 대한 정죄는 불가피합니다. 우리는 선의 자리에서 악을 응징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정죄 자체로 모든 것이 끝날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징벌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은 정죄자의 자기 절대화와 정죄된 자에 대한 증오의 전승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의 비극입니다. 정죄는 용서를 위한 것입니다.

종교문화가 지닌 종말론은 정죄와 심판과 징벌의 '닫힌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사랑과 용서와 재생의 '열린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닫힘을 열게 한 것은 정죄하고 용서하는 주체인 신이나 절대자가 자신이 정죄한 객체를 위해 자기를 죽이거나 자기를 파기하는 용서였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없지 않았습니다. 너무 많은 선한 신들이 너무 많은 악을 '생산'하고, 그 악을 징벌하면서, 결국 과잉하는 '악의 정죄'속에서 신은 물론 선도 유실되는 경우가 없지 않았습니다. 이른바 '우상'에 대한 두려움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때로 '성상(聖像) 파괴'만이 그 신과 선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정죄'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요. 우리 공동체의 '용서'는 어떻게 펼쳐지고 있는지요, 우리 역사는 어떤 '성상 파괴'의 흔적을 증언하고 있는지요. 두루 살펴보고 싶습니다.

정진홍 이화여대 석좌교수·종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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