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를 파리에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은 파리 진출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었던 2003년 무렵이었다. 우리 전통문화로 고민하던 중 광장시장에서 알고 지냈던 무속인 이해경씨를 우연히 만났다. 순간 이거다 싶어 파리에 같이 가자고 했다.
이렇게 해서 샤머니즘이란 가장 토속적인 테마를 들고 파리컬렉션을 준비하게 되었다. 어쩌면 우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그들에게 가장 적나라한 우리 것을 보여 준다는 발상 자체가 지극히 무모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작업을 하면 할수록 '과연 내가 저 옷을 이길 수 있을까?'하는 경외감이 들만큼 그 안에는 엄청나게 많은 디테일들이 숨겨져 있었다.
컬렉션 당일 프랑스 문화의 심장인 파리 루브르 박물관 지하에 마련된 쇼장에는 한국에서 공수해간 솟대들이 세워졌다. 쇼가 시작되고 오프닝에 등장한 이해경씨는 마냥 신기하게만 바라보는 파란 눈들 앞에서 가장 한국적인 샤머니즘을 선사해 주었다. 그런데 결과는 프레스들로부터는 매우 신선한 반응을 얻었지만, 상업적인 성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 때 나는 '문화는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먼저 관심을 갖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된다'는 답을 얻었다. '입을 수 없으면 세계화 할 수 없다'는 단순한 명제. 전통문화는 계승ㆍ발전시켜야 하지만 전통과 산업은 분명히 다르다는 오래 전 생각이 다시 되살아났다.
외국인들이 우리문화를 입게 만들려면 어떤 의미에서 전통을 과감히 깨뜨리고 해체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들이 낯선 문화를 접하고 느끼는 단순한 호기심이나 신기함 만으로 승부를 걸어서는 안 된다.
97년도에 'IMF 사태'가 발생하기 직전 파리가 아닌 런던에 먼저 진출하려던 무렵, 당시 인터뷰에서 나는 한국적인 것으로 승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이미 밝힌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때도 실루엣은 반드시 서양적이어야 한다고 말했었다.
가령, 유럽에 소개된 지 100년이 넘는 기모노는 외국에도 많이 알려졌지만 그것을 외출복으로 입지 않는다. 이유는 일상적인 생활을 하기에는 불편하기 때문이다. 한복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입었을 때 거부감이 없고 활동하기 편하면서 이미지는 동양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당시 내 생각이었다.
파리에서 우리문화를 소재로 삼은 것은 샤머니즘을 주제로 한 2003년도가 처음이었지만 내가 국내에서 우리문화를 가지고 작업을 했던 것은 데뷔 때부터다. 85년도 브랜드를 런칭하면서 디자인한 데뷔작은 '백의 민족'을 테마로 한복과 태극기를 가지고 작업을 했다.
이 후 86년 미국에서 열린 '프레트(PRET)'라는 해외전시에 참가하면서도 전통 소재인 모시를 작업에 사용했고, 91년에는 우리 전통 매듭과 대나무 바구니의 조직을 모티브로 디자인을 전개했다.
이후에도 한국적인 모티브는 계속 이어졌다. 95년 '태'를 주제로 죽산예술제에서 했던 패션 퍼포먼스도 그렇고, 런던 컬렉션을 염두하고 있었던 97년 민화ㆍ대나무ㆍ자수를 모티브로 디자인한 컬렉션에서도 한국적인 소재를 사용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지금 파리에서도 마찬가지지만 해외시장을 목표로 했을 때는 꼭 한국적인 모티브를 먼저 찾았다는 점이다. 내가 그들과 경쟁해서 더 잘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 문화라는 생각에서였다.
샤머니즘을 선보였던 2003년 이후부터는 한국의 문화적인 요소를 파리 컬렉션에 접목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화제가 되었던 한글 패션쇼도 이런 과정의 결과물이었다. 사라져가는 우리 문화를 어떻게 접목해 산업화 하는가가 현재 나에게 가장 중요한 화두다.
2006년 '겨울 숲'을 주제로 겨울나무 숲과 한글 서체를 선보인 컬렉션이 큰 반응을 얻고 난 후 그 해 가을 또 다른 한국적인 퍼포먼스를 위해 서예가 조성주씨와 함께 파리로 건너갔다.
키 만한 큰 붓으로 바닥에 한글을 쓰고 그 먹이 마르기전 모델들이 그 위로 수많은 발자국들을 남기면서 한글이 전세계적으로 퍼져나가길 기원하는 퍼포먼스였다.
이 때 선보인 먹이 번지는 프린트들을 외국 기자들은 동양의 꽃으로 표현해가며 칭찬했다. 이후 이것을 모방한 이와 비슷한 프린트들이 심심치 않게 세계시장에서 목격되기도 했었다.
2007년에는 한국 고가구의 문고리 장식과 자개, 전통적인 구름과 박쥐무늬를 퓨처리즘과 접목해 표현했다. 전통가구의 모티브들은 벨트, 가방, 포켓 등 디테일에 이용하면서 모던하고 장식적인 의상들을 발표했다. 이 테마는 사실 내 사무실에 파티션처럼 사용되는 오래된 대문에서 영감을 받아 작업했다.
한국적인 모티브를 사용하더라도 의상은 다분히 서양적이어야 한다는 나의 생각은 언제나 변함이 없다. 2007년 가을에 발표한 의상은 독일의 바우하우스와 한국의 소나무에서 영감을 받아 건축적이고 구조적인 실루엣에 사군자와 소나무의 프린트들이 어우러졌다.
그리고 다음 시즌인 2008년에는 아방가르드한 실루엣에 손자수를 이용해 목단 꽃과 국화를 가득 넣기도 했고, 가을에는 서울 디자인 올림피아드의 홍보대사로 활동하면서 심볼 마크인 '디지털큐브'를 테마로 전통적인 조각보와 현대의 규비즘을 연계해 작업했다.
마지막으로 올 봄에 있었던 이번 가을/겨울의 옷에는 18세기 김홍도의 민화와 우리 민화에 자주 등장하는 호랑이를 테마로 사용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
어떤 사람들은 직설적인 나의 디자인을 보고 내가 자기 색깔이 강한 디자이너라고 하지만 정작 나는 어떠한 색깔도 가지고 싶지 않다.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옷을 지을 뿐이라는 것이 나의 일관된 패션 철학이다.
옷이라는 매개를 통해 자신의 감성을 타인에게 전이시키고 또 공유하고 싶은 것이 나의 꿈이다. 전통문화에 대한 내 생각도 내 작업을 통해 널리 전파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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