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문관 서희(942~998)는 우리 역사상 최고의 협상가다. 소손녕과의 회담에서 80만 거란 대군을 회군토록 한 것은 전무후무한 외교적 성과로 꼽힌다. 서희의 협상 승리는 거란의 침략 목적을 간파한 데서 출발했다. 협상 초반, 그는 거란이 영토 확장을 위해 침공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 속셈은 송(宋)을 공격할 때 고려를 묶어 두려는 것이었다. 서희는 압록강 주변 옛 고구려 땅이 고려 것임을 논리정연하게 설명하면서 여진족이 거란과의 관계를 막고 있다고 강조해 강동 6주를 얻는 실리까지 챙겼다. 적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해 논리로 상대를 압도한, 협상의 진수라 할 만하다.
▦미국의 분쟁 해결 전문가 시어도어 W. 킬은 상대에 대한 이해를 협상 성패를 결정할 최우선 요소로 꼽는다. 킬은 <문제는 협상가다> 라는 저서에서 협상이 성공하려면 상대를 이해하는 토대 위에서 신뢰ㆍ성실의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협상은 상대를 제압할 방법을 찾는 처세가 아니며, 타인의 강요가 아닌 자기 의지에 따라 타인과의 조화로움을 찾아가는 방법이라고 강조한다. 킬은 법에 의한 분쟁 해결보다 협상ㆍ조정ㆍ중재를 동원한 자유의지적 해결이 더 유용하다고 보았는데, 협상 문화 및 시스템 부재로 갈등의 부작용과 후유증이 큰 우리 사회가 새겨 들을 만한 대목이다. 문제는>
▦그러나 협상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지미 카터, 로널드 레이건 전 미 대통령의 테러협상 자문역을 지낸 협상가 허브 코헨은 협상의 성공 여부를 결정하는 세 변수로 힘, 시간, 정보를 든다. 누가 협상을 주도하는지, 언제까지 협상이 가능한지, 상대에 대한 정보를 얼마나 갖고 있는지에 따라 결과가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변수를 통제할 수 있어도 상황이 더 꼬이거나 아예 실패로 끝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그래서 코헨은 협상을 할 때는 상대와 공통 관심사를 만들거나 신뢰를 형성하고, 상대의 필요를 우선 충족시키는 소프트웨어적 방법이 우선돼야 한다고 조언한다.
▦동서고금의 명 니고시에이터(Negotiator)에 공통된 협상 철학은 상대에 대한 이해와 배려 같은 가치들이다. 그들은 상대의 의견과 입장을 듣고 접점을 찾으려는 의지가 있어야 협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실증해 보였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현실은 어떤가. 세종시, 4대 강 논란을 보면 독선과 아집만 득세하고 있다. 국가 미래를 위해 좋은 사업을 하는데 웬 시비냐는 식이다. 하루 아침에 입장을 180도 바꾸고도 사과 한마디 없이 변경의 당위성만 강조하고, 상대 진영의 분열을 유도하는 전략을 쓰니 협상정신이 발휘될 틈이 생길 리 없다. 진정 정부와 여당은 서희의 지혜를 배울 순 없는 것일까. 참 답답하다.
황상진 논설위원 apri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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