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청년 '로묘'는 남원 토호 문태규의 아들이요, 그와 인습을 벗어난 비련을 나누는 '주리'는 함양 귀족 최불립의 딸이다. 철천지 원수 집안의 꽃 같은 남녀는 숙명적 비련에 빠진다. 중세 이탈리아 베로나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경상도 사투리와 전라도 사투리의 씨름으로 변한다. 두 가문의 피 끓는 젊은이들이 힘을 겨루던 베로나 광장은 남원과 함양을 이어주는 팔랑치 고갯마루로 대치된다.
국립창극단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번안극의 창극화를 내걸고 선보이는 무대다. '장끼전'(2005년), '시집 가는 날'(2006년), '산불'(2007년) 등 일련의 창작 창극 무대를 보다 확충한 결과다. 지난 2월 초연, 판소리 버전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관심을 끈 이래 서울광장 등지의 야외 공연을 통해 꾸준히 보완된 작품이다.
"우리 손잡고 있듯, 우리 입술 그렇게 해."(로묘) "그럼 네 입술의 죄, 내 입술이 씻어주네."(주리) 죽음을 코앞에 두고 나누는 연인들의 대화다. 지극히 현대적인 대사를 풀어내는 것은 전통 판소리 선율이다. 판소리 명창 안숙선의 작창, 현대적 색깔을 가미한 국립창극단 이용탁 음악감독의 작곡, 창극 배우 출신으로 창작 판소리를 정교화하는 데 주력해온 박성환 서울창극단 대표의 연출 등 탄탄한 인력의 협업이 버전업에 함께 했다. 그 가능성의 터전을 제공한 대본은 순천향대 이현우 교수, 연극평론가 김향 등 셰익스피어를 공부한 이론진이 애쓴 결과다.
철저한 한국적 변신을 내건 만큼, 두 연인의 사랑을 이어주는 신부의 사제관이 구룡폭포 근처 무당집으로 탈바꿈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늦둥이를 낳으면 명 길어지라고 무당을 새엄마 삼아 부르게 하던 풍습 등 한국적 관례, 등장인물들이 앞다투어 구사하는 경상도와 전라도 사투리가 변신을 보장한다. 북청사자춤, 버나 돌리기, 줄타기, 기와밟기, 답교놀이 등의 전통 연희 양식에 무대는 서양 무대가 넘보지 못할 신명마저 가득하다. 박애리-임현빈, 민은경-이광복 커플의 연기를 비교하는 것도 큰 재미다.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12월 5~13일(화~금 오후 7시30분, 토 일 4시). (02)2280-4115~6
장병욱 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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