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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필 기자의 바깥] <23> 허리우드클래식 김은주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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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필 기자의 바깥] <23> 허리우드클래식 김은주 사장

입력
2009.11.23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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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탑골공원 뒤편 종로구 낙원동 284번지 일대. 2,000~3,000원짜리 국밥집과 수십 년씩 된 떡집들이 있고, 그 만큼 오래 된 악기상가들이 줄지어 층지어 모여 있는 곳. 저물녘 미로 같은 건물의 어느 모퉁이를 돌면 낡은 색소폰 가방을 버거운 자부인 양 들쳐 멘 장발의 악사나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면서도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던 젊은 시인의 영혼을 마주치게 될 것 같은 곳. 두어 걸음 나서면 하루하루 상전벽해가 따로 없는 인사동이고 종로 한복판이다. 유수의 세월 따라 낙원동의 풍경도 사람도 국밥 가격의 보폭만큼이나마 느리게 변했겠지만 그래도 왠지 한량없이 그리 있었고 있을 것만 같은, 흑백사진 같은 곳. 그 동네의 랜드마크처럼 왕복4차로 도로를 가랑이 사이에 끼고 만 40년을 오연히 종로 복판을 내려다보고 선 건물 꼭대기 층에 허리우드극장(1969년 8월 개관)이 있다.

'킹콩' '타워링' 같은 블록버스터 개봉관이었고, 한창 때는 매표객이 건물을 한 바퀴도 넘게 에워싸기도 했다는 곳이다. 알다시피 복합상영관이 대세를 이루면서 허리우드는 급격히 시들어갔다. 서울 10대 개봉관으로 어깨를 겨루던 대한 서울 국도 중앙 명보 단성사 피카디리 스카라 국제극장이 대부분 건물을 새로 짓거나 리모델링하며 '복합 전열'을 갖추는 동안에도 허리우드는-입지가 입지인지라-제대로 손을 써보지 못했다고 한다.

지난 19일, '21세기를 여는 젊은 극장 허리우드'라는 10년도 더 된 홍보간판을 달고 선 허리우드 클래식의 상영작 포스터는 한진희ㆍ정윤희 주연에 김민희가 아역으로 출연한 1981년작 '사랑하는 사람아'였고, 2회 상영(오후 2시30분) 관객은 30여 명(객석 300석)에 불과했다.

막바지로 가면서 영화는 대사 절반 흐느낌 절반이었고, 객석의 훌쩍임과 헛기침도 따라 빈번해졌다. 슬픔이나 한(恨) 같은 추상의 단어가 실어 나르지 못하는, 그래서 꼭 눈물 콧물 같은 단어여야만 피가 통하는 문맥이 있고 감정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평균 연령 70대는 됨직한 관객들은 유서 깊은 신파의 위력 앞에 파문처럼 흔들렸고, 그 물결은 '한 냉소 한다' 했던 40대 초반의 감성까지도 적셨다.

'새드 무비'가 끝나고 불이 켜지자마자, 1년 전부터 실버 극장을 선포하고 극장 간판을 '허리우드 클래식'으로 바꿔 단 젊은 사장 김은주(35)씨가 들어선다. "어르신들 영화 잘 보셨어요? 할아버지 또 우셨죠?!"

앉은 자리에서 곧장 관객들의 작품 평가가 시작된다.

"똑순이 쟤가 지금 서른여덟인데 열살 때 찍은 거여, 연기 참…."

"김 사장 언제 후편 틀어? 애랑 엄마랑 저렇게 떼놓는 거 보고 가면 잠을 못 잘 것 같아."

"난 세 번째 보는데 그래도 눈물이 나네."

"정윤희 진짜 예쁘네. 칼도 안 댔을 텐데…."

경기 구리시에서 점심 챙겨먹고 나서서 혼자 버스 전철 갈아타고 왔다는 권숙희(70) 할머니는 극장에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영화 전반부를 못 봤다며 다음 상영 시간을 기다리고 앉아 있었다. "옛날 여자들은 저렇게 한이 많았어." 단골 관객으로 안면을 튼 듯 주변에서도 한 마디씩 거들고…. 영하의 추위가 매서웠지만, 스크린 꺼진 극장 안은 노년의 따사로운 사랑방으로 변하고 있었다.

김 사장은 마주앉자마자 법전만큼 두툼한 종이 뭉치를 꺼내 보였다. "오늘이 사흘째예요. 어르신들이 자청해서 해주신 서명이 벌써 1,000 건이 넘었어요." 극장 운영이 어려우니 시(市)에서 총대를 매야 한다는 청원 서명이었다.

_어려우세요?

"3년 전에 산 스포티지 승용차를 지난 달에 팔았어요. 직원 월급은 줘야겠고, 자본금은 1년 새 다 까먹었고…. 집도 얼마 전에 내놨어요."

_자본금이?

"3억원 정도 들고 시작했어요. 1년에 극장에 5억~6억원 정도 들어요. 직원 6명 인건비에 운영비, 임대료, 로열티, 필름값 등등 빠듯하게 써도 그쯤 돼요."

_도와주는 데는?

"여기저기 협찬 제안서를 냈는데 SK케미칼이 매달 1,000만원씩 1억2,000만원을 지원해줬어요. 극장으로선 국내 유일 노동부 지정 '사회적 기업'이거든요."

_서울시는 안 돕나? 실버벨튼가 뭔가 한다던데.

"지난해 10월에 시청에 들어갔더니 예산이 없어 곧장은 어렵다고 하시데요. 실버극장 취지에는 공감하신다며 선포식날 높은 분들도 오셨고, 주무부서도 극장 홍보에 힘을 보태셨어요. 그래서 올해 또 찾아갔는데 전망이 썩 밝지만은 않나 봐요. 예산항목 새로 만드는 게 그렇게 어렵다네요."

_입장료를 올리시지. 임대료도 좀 깎고.

"지금 2,000원(57세 이상)씩 받아요. 어르신들 찾아오시는 것만도 고마운데 더 부담드릴 순 없죠. 임대료는 우리 형편에는 좀 부담스럽긴 하지만 시세로는 합리적인 선이에요. 어찌 해봐야죠. 인건비라도 아끼라며 얼마 전부터 어르신들이 돌아가며 검표 일을 맡고 계세요."

경기 성남지역 초중등학교 교장 출신 모임인 성남시교육삼락회 회장을 맡고 있다는 이상무(72)씨는 거의 매주 한 프로도 빼먹지 않고 챙겨 보는 단골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우리 회원들이 120(서울시 통합 민원전화)에 전화도 수 차례 했어요. 여기 지원하라고. 관에서 해도 벌써 했어야 할 일을 이 젊은 여사장한테 내맡겨놓는 게 말이 됩니까."

전산 전공하고 외환은행에 취직해(1997년) 영화카드 업무 맡아 하던 중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담당부서가 해체됐고, 그 사이 알게 된 극장 사장들의 제안으로 영화 홍보업무를 시작하게 됐고, 수완을 인정받아 서대문의 화양극장(현 드림시네마) 기획·마케팅 총괄 일을 5년 정도 했고, 스카라극장 대표로 발탁돼(2004년 12월) 1년 남짓 일했는데 건물 문화재 지정 소식에 놀란 주인이 극장을 허는 바람에 손을 털어야 했고, 드림시네마로 다시 옮겼는데 그 일대 재개발 계획이 서는 바람에…, "그러다 허리우드를 차고 앉게 된 거죠. 그게 지난 해 4월입니다."

드림시네마 시절 그는 '더티댄싱' '영웅본색' '미션' 등 고전 영화 배짱 상영으로 매스컴을 탄 바 있다. 붓으로 그린 옛날식 영화 간판을 고집했고 극장 로비에서는 LP판을 틀기도 했다. "한 노부부가 우리 영화가 너무 좋다며 막 우시는 겁니다. 어떤 분은 밥 사겠다고 저를 찾고, 어떤 분은 '이런 영화 계속 해달라'고 부탁하시고…." 그러는 동안 그의 마음도 조금씩 그 쪽으로 기울었을 것이다. 그래서 허리우드 맡아보라는 극장주의 제안을 덥석 움켜쥐었을 것이고, 실버극장을 시작했을 것이다. "어르신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멀티플렉스 극장을 불편해 하세요. 시스템도 불편하고, 분위기도 불편하고, 또 그 쪽 영화도 불편하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으세요."

허리우드 운영 1년 남짓 사이에 그는 낙원동 일대에서, 적어도 할아버지 할머니 사이에서 유명인사가 됐다. "큰 짐 들고 가면 어르신들이 대신 들어주시기도 하고, 비 맞고 가면 우산도 씌워주세요. 인사하며 지내는 어르신이 못 해도 400분은 될걸요?!" 작은 관심과 배려에도 크게 감동하는 그의 '어르신들'처럼, 그도 어르신들이 이따금 건네는 양갱 하나, 캔 음료수 하나에 크게 울렁인다. 외로운 사람들이 대개 그렇다.

그는 여건이 되는 대로 허리우드 클래식의 로비를 어르신들의 공간으로 꾸미고 싶다고 했다. LP판으로 '별들의 고향' 같은 옛 영화 음악도 틀고, 엿치기 같은 놀이판도 벌이고, 팔각 성냥통을 테이블마다 놔두고 무료할 땐 탑 쌓기도 할 수 있는 그런 '허리우드 클래식'을 꿈꿀 때 그는 다음달 직원 월급 걱정으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난다. 대한노인회 이사인 서울시의회 보건복지위 홍광식 부위원장도 김 사장의 팬인 듯했다. 그는 "시장이 노인복지 얘기는 많이 했지만 표나게 뭘 한 건 없어요. 예산 심의를 하는 중인데 쉽진 않지만 어떻게든 해봐야죠"라 말했다.

가장 바람직한 해법은, 하나마나 한 말이겠지만, 허리우드클래식이 경영적으로 자립하는 것일 테다. 그러자면 노년뿐 아니라 청년과 중ㆍ장년의 취향과 욕구까지 만족시킬 수 있는 좋은 영화를 더 많이 상영하고 홍보해야 한다. 그래서 허리우드클래식이 특정 연령의 문화적 섬이 아니라 취향 따라 노소가 모여 함께 어울리는 공간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또 돈 드는 일이다. 김 사장 말이 '애수' 같은 외국 명화 한 편 상영하는 데 로열티만도 5,000만원이 든다고 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공간이든 시간이든, 모든 밀려나고 사라지는 것들에는 사연이 있고 논리가 있다. 사연이 안타깝고 논리가 부조리해도 거기에는 도덕과 당위의 맥락으로 치환되지 않는 시스템의 힘이 있다. 어떤 것을 밀어내고 사라지게 하는 데 앞장서는 것(혹은 사람 혹은 논리)들은 그 시스템의 내력벽(耐力壁) 뒤에 숨어 도덕적 부담을 덜고, 동시에 시스템을 두텁게 한다. 시대의 조류(潮流)라고도 부르고, 지배적 가치라고도 부르는 그것들이 시대와 사회를 아우르는, 데카르트의 용어로 말하자면, 보편 이성에 닿아있었던 때와 경우를, 서글프게도 우리의 역사책은 소개한 적이 없다. 그래서 인류는 부조리를 견디는 내성을 다윈의 비정한 가르침처럼 키워야 했고, 그것이 때로는 맹목의 행복으로 보이기도 한다. 지금도 낙원동과 허리우드극장 언저리를 슬픈 얼굴로 헤매고 있을 것 같은 시인이 생전에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했던 것도 어쩌면 세상에 대한 충분한 내성이 없었거나 충분히 맹목적이지 못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최윤필 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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