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대궐 안에서 아들을 아사시킨 전대미문의 참극. 사도세자의 죽음은 소설과 드라마의 단골 소재였다. <충신> (문이당 발행)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소재로 한 또 한 편의 장편소설이다. 충신>
그런데 이 소설은 좀 다르다. 주목할 점은 두 가지다. 사도세자의 죽음이 정파 간 알력에 의해 빚어진 사건이라는 통념을 뒤엎고, 사도세자가 근친상간을 범했고 매독에 걸려 영조의 노여움을 사 뒤주에 갇히게 됐다는 발상이 그 하나다. 두번째는 재기발랄한 상상력과 촘촘한 디테일을 결합해 자칫 식상해지기 쉬운 소재를 이처럼 흥미진진하게 풀어낸 저자가, 한국어를 한 마디도 할 줄 모르는 벨기에 사람이라는 점이다.
부산에서 태어나 일곱살 때 벨기에로 입양된 여성 마르크 함싱크(36)가 이 소설의 작가다. 그가 250여년 전 조선으로 시야를 돌린 것은 업무 때문이었다. 영국계 보험회사에서 일하는 그의 주 업무는 보험물의 가치를 조사하는 것. 영조 때 영의정을 지냈던 이천보의 문집 '진암집'의 가치를 알아봐 달라는 한 프랑스인 고서적상의 의뢰가 이 소설을 쓰게 된 단초였다.
고서에 대한 가치 판단도 중요했지만 파고들면 들수록 이천보의 행적이 의심스러웠다. 이천보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후에 조선 왕조에서 보기 드문 불천위(不遷位ㆍ나라에 큰 공을 세운 신하에게 허용하는 제사)에 봉해졌다는 사실이 그의 흥미를 끌었다. 이천보뿐 아니라 당시의 좌의정 이후, 우의정 민백상이 잇달아 자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고 했다. '삼정승의 자살'이라는 사건과 사도세자의 비극이 연관됐을 것이라는 가정이 바로 소설 <충신> 의 모티프다. 충신>
깊어진 세자의 병을 걱정하는 삼정승의 비밀회동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이들의 이야기를 엿들었던 이천보의 양아들 이문원이 세자의 병인을 추적하면서 마주치는 무서운 진실을 다루고 있다. 중국 하얼빈대에서 중의학을 공부한 작가가 의학 지식을 바탕으로 추론하는 사도세자의 병인은 매독이다. 작가는 사도세자가 여동생 화완옹주의 처소에서 기생이나 여승 등과 난잡한 성적 일탈 행동을 하다 매독에 걸렸으며, 근친상간의 추문을 우려한 영조가 뒤주에 가둬 죽였다는 가정 하에 상상력을 전개한다.
작가는 네덜란드어를 기본으로 한문과 그리스어 등을 섞어 원고를 썼고, 그것을 작가의 직장 동료가 맛깔나는 한국어로 옮겼다. 작가는 "궁중의 깊숙한 곳에서 벌어지는 음모는 아니지만, 한 시대를 살아간 인간이 당시 최고의 미덕인 충성, 강직함 등을 어떻게 추구했는지를 비장한 스토리로 보여주고자 했다"고 스스로의 작품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책에는 작가의 얼굴 사진도 실려 있지 않다. 다른 사람의 재산을 관리, 보호해야 하는 그의 직업 특성상 얼굴 공개를 꺼린다고 출판사 측은 밝혔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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