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지난 13, 14일 일본 방문 때 히로시마에는 가지 않았다. 세계 2차대전 막바지에 미국의 원자폭탄 공격을 받았던 피폭의 현장을 찾아 달라는 일본측의 끈질긴 요청을 물리친 것이다. 원폭 피해지인 히로시마, 나가사키로의 '간곡한'초대는 종전 후 역대 미 대통령의 방일 때마다 되풀이 됐지만 특히 이번에 일본인들의 기대감은 과거 어느 때 보다 컸다고 한다. 오바마 대통령이 4월 프라하에서 '핵무기 없는 세계'를 역설한 데 이어 놀랍게도 노벨평화상까지 타게 됐기 때문이다. 일본으로선 기대에 부풀었던 만큼 실망도 못지 않았을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히로시마에 갔다면 또 하나의 '역사상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녔을 것이다. 그런데 그를 포함, 일본을 방문했던 미 대통령들은 왜 모두 '최초'가 되기를 마다했을까. 히로시마행 자체가 혹여라도 64년전 전쟁을 끝내기 위해 원폭을 투하키로 결정한 데 대한 반성, 참회로 비칠 것을 우려한 때문이다. 일본은 항복했지만, 인류의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그 결정을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우리가 풀어가야 할 숙제다.
그렇다 해도 일본의 진주만 도발로 태평양 전쟁에 휘말리게 된 미국이 국가적 차원에서 논란의 존재를 인정하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더욱이 일본의 역대 총리들 가운데 누구도 재임 중 진주만을 방문하거나 진주만 공습에 대해 사과한 적이 없는 상황에서는 더 그렇다. 이러한 국제정치적 현실 때문에 미 언론들이 히로시마로의 초대에 '불편한', 심지어 '두려운'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있는 것도 전혀 이해 못할 일은 아닌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 후 첫 아시아 순방은 한국 방문을 끝으로 19일 마무리됐지만 히로시마 방문 문제가 '과거형'이 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보다 뚜렷하게 현재진행형, 또는 미래형 현안으로 자리 잡았다. 실은 오바마 대통령이 방일에 앞서 일본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이번에는 못 가나) 임기중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방문하는 기회를 갖는다면 영광"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는 임기중 히로시마 '최초' 방문을 희망한 것이나 일본인들에겐 오바마 대통령의 약속으로 들렸을 법하다. 히로시마는 오바마 대통령의 재선 성공 여하에 따라 향후 3년내, 또는 7년내에 언젠가는 이뤄질 그의 일본 재방문을 손꼽아 기다릴 것이다.
태평양을 사이에 둔 미일간 줄다리기를 바라보는 우리의 심경은 착잡하기 이를 데 없다. 그것이 미일간 문제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에 따르면 당시 강제징용 등으로 인해 정말로 원통하게 희생당한 한국인(조선인) 피폭자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각각 7만여명(사망 3만5,000여명), 3만여명(사망 1만5,000여명)으로 추정된다. 이들이 아직 역사의 질곡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 미일이 만나 "과거를 잊고 앞으로 핵 없는 세상을 위해 함께 노력하자"는 이벤트를 벌인들 그게 해결책은 아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 때의 한일관계 및 동북아시아 정세 등에 따라서는 우리가 미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에 반대해야 하는 처지가 될 수도 있다.
또 다른 현실적 제약이 있다. 예를 들어 북한 핵위협이 고조됐을 때 미 대통령이 히로시마에 간다는 것은 여러모로 어색하다. 일의 순서로 보면 오바마 대통령에게는 재임 중 북핵 완전폐기에 진전을 이루고 세계적 차원의 핵무기 감축을 성공적으로 진행시켜야 할 책무가 우선이다.
고태성 국제부장 tsg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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