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선진국으로 나아가려면 무엇보다 법치주의가 확립되어야 한다고 모두 입을 모아 말한다. 선진국이 되려면 공동체에 신뢰라는 자산이 축적되어야 한다고도 한다. 신뢰는 공동체 구성원 간에 행위의 룰을 형성하는 것이고, 이는 곧 규범의 바탕이 구축됨을 뜻한다.
그렇게 되면 누구나 자기 미래와 정부나 다른 사람들의 행위를 예측하면서 삶을 영위할 수 있기에 불필요한 삶의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 이런 신뢰나 규범은 정부와 개인 간, 그리고 개인과 개인 간에 구축해야 하는 것이다.
고위 공직자들이 더 법 안 지켜
우리 사회에서 법치주의를 유난히 들고 나올 때를 보면, 주로 과격한 불법시위나 법을 무시하고 다중의 힘으로 떼를 쓰는 행위들을 비난할 때로 기억된다. 지난 정부에서도 그랬고 이 정부 들어서도 그랬다.
그러나 법치주의는 입법, 행정, 재판 등 각종 국가행위에서 행위준칙과 규범을 정립할 때 비로소 확립되는 것이고, 그 실현도 위에서부터 먼저 법을 지켜야 보통사람들의 삶에서도 법이 지켜지게 된다. 국회나 행정부, 법원부터 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국민에게 법을 지키라고 하는 것은 설득력도 없거니와 도리어 법을 우습게 만들어 버린다. 위에서도 지키지 않는 준칙이나 규범은 아무리 법의 형식을 띠고 있어도 법이 아니고 강자의 힘일 뿐이다. 따라서 설득력이 있을 리 만무하다.
이번에 공개된 자료에 의하면, 2006년부터 2008년까지 장관이나 차관 등 고위직을 지낸 사람들이 공직자윤리법에서 취업을 제한한 사기업에 취업한 것이 68명에 이른다고 한다. 공직자가 퇴직한 뒤 재직 시의 업무와 관련된 영리업체에 취업하지 못하게 제한하는 것은 국가의 공공성과 중립성, 청렴성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총리나 각 부처의 장관이나 차관 등 중요한 일을 처리하던 사람이 퇴직하기 바쁘게 관련 업체에 취업한다든지, 바로 직전까지 조폭이나 기업범죄 등을 수사하던 검사들이 옷 벗기 바쁘게 조폭사건을 서로 수임하려고 나서거나 관련 기업에 큰 돈 받고 스카웃되어 가는 것이라든지, 기업사건을 재판하던 판사까지 옷을 벗고 바로 그 기업에 취업하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법치주의의 위반이다. 공직을 더럽히고 법치주의에서 말하는 이해관계충돌의 회피원칙을 위반하는 행위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국회는 목적을 위해서는 절차쯤은 무시해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재판에서는 사실관계에 변화가 없음에도 검사의 구형과 판사의 선고형과 항소심의 재판이 들쭉날쭉이다. 이에 더해 대기업 총수나 힘 있는 자들이 죄를 저지른 때는 얼마 안 있으면 무슨 구실을 대서라도 보석, 가석방, 사면 운운하며 다들 빠져 나간다. 그러니 무전유죄(無錢有罪)라는 말이 여전히 공감을 얻고 있다. 지난 정부에서는 대법원장까지 나서서 화이트칼라범죄 운운하며 호박이라도 찌를 듯이 하더니만 어느새 이런 말은 쑥 들어갔다.
과거 권위주의시절에 개헌을 말하는 사람을 마구 감옥에 잡아넣은 적이 있다. 그러나 국민들은 주권자인 국민이 개헌을 말하는데 왜 처벌하느냐, 오히려 그런 법이 위헌이라며 저항했다. 그랬더니 법무부장관이 하는 말이 "법대로 하자"며 들고 나왔다. 그것이 법치주의라고 했다.
그들에게는 '법대로 하는 것'이 '불법인 법'에 따라 사람을 마구 처벌하는 것을 의미했기에 국민들은 "법 좋아하시네, 너나 법대로 살아라" 하며 모두 냉소에 부쳤다. 법치주의를 내세운 것이 오히려 법을 조롱거리로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법치국가 실현할 시스템 필요
법치주의는 편리할 때 갖다 쓰는 구호가 아니다. 이는 국가, 사회, 개인 간에 공통적으로 구축해야 하는 규범체계이고, 예외 없이 누구나 지켜야 하며, 특히 위에서부터 지켜야 실현이 가능한 공동체의 규범질서이다. 정말 힘이 아니라 법이 지배하는 사회를 만들고자 한다면 법치국가 실현의 프로젝트를 국가적 차원에서 마련하고, 그 로드맵을 만들고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이런 것 없이 법치주의만 방패처럼 들이대면 '양치기 소년의 화'를 면할 수 없게 된다.
정종섭 서울대 교수 · 새사회전략정책硏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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