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지하철 2호선 홍대역 인근 주점 2층에 지난달 9일 일군의 시인들이 모였다. 올해 갓 등단한 이우성 시인이 이 자리의 막내였고, 시력 20년인 김기택 시인이 가장 고참이었다. 이들 외에도 등단 순으로 이윤학, 손택수, 조 정, 길상호, 임경림, 김일영, 예현연, 이용임씨까지 10여명의 시인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나이는 물론 활동지역도 제각각인 시인들이었다. 시인이라는 것 말고는 공통점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이들이었지만 모임은 어느 자리보다 화기애애하고 왁자지껄했다. 등단 3년 만에 첫 시집 <달의 아가미> 를 낸 김두안 시인을 축하하기 위해, 한국일보 신춘문예 출신 시인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이었다. 달의>
"술만 마셔도 '큰 시인'을 느낀다"
한국일보 출신 시인들은 지금 우리 시단의 중추를 이루고 있지만 조직적이랄까 하는모임은 없었다. 2006년에야 첫 모임이 이뤄졌다. 그해 1월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상식에 참석한 조 정 시인이 막 등단한 김두안 시인에게 "내년부터 후배들을 격려해주자"고 제의한 것이 계기. 그 해 봄 2000년 이후 등단한 이들을 중심으로 6명이 첫 모임을 가졌고, 이후 시집 출간 축하 혹은 송년회 등으로 모임이 이어졌다.
전위적인 조연호 시인부터 서정적인 손택수 시인까지, 스타일은 다양하지만 이들의모임은 한번 만나면 저녁부터 다음날 점심 때까지 술자리가 이어질 정도로 끈끈하다. 회장, 총무 하는 흔한 직책은 없다. 모임에서 나오는 이야기도 "왜 요즘 시 부지런히 안 쓰냐?"라고 서로 격려하는 정도일 뿐, "사귀는 사람은 없어?" "애는 잘 커?" 하는 살아가는 얘기가 대부분이다.
올해로 등단 12년차가 된 손택수 시인은 "일간지 신춘문예 출신은 등단 과정은 화려한 반면, 청탁이 많은 문예지 출신들에 비해 시단에서 가끔 소외감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라며 "한국일보 신춘문예 출신 시인들의 모임은 서로 외로움을 나누고 정서적으로 격려하는, 목적 없는 순수한 모임"이라고 소개했다. 이용임 시인(2007년 등단)은 "한국일보 출신은 문단에서 자리잡은 선배들이 많은 편"이라며 "작품 얘기 안 하더라도 '큰 시인'들과는 가만히 술만 마셔도 왜 큰 시인인지 느낄 수 있어 모임에 나오게 된다"고 말했다. 길상호 시인(2001년 등단)은 "임원을 뽑거나 회비를 내는 등, 편안하게 어울릴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보자는 취지에서 벗어나는 일은 한 가지도 안 하기로 했다"며 "한 뿌리를 가진 시인들의 순수한 어울림의 장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얀 밤을 지새울 예비 시인들에게
한국일보 신춘문예 출신 시인들은 '조용하지만 실력을 갖춘' 시인들로 시단에 정평이 나있다. 예컨대 2005년 격월간 시전문지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1990~2000년 중앙 일간지 신춘문예 출신 시인들을 '작품성'과 '활동성'을 기준으로 평가한 특집에서 한국일보 출신들은 합산 점수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상위 5명 가운데 3명(박형준, 손택수, 이윤학)이 한국일보 출신이었다.
한국일보 신춘문예 등단을 꿈꾸는 예비 후배들에 대해 선배들은 "자신의 시에 믿음을 갖고 기본기를 잘 갖추라"고 입을 모았다. 김기택 시인은 "한 해 중앙 일간지 신춘문예로 등단하는 시인들 중 꾸준히 활동하는 사람은 평균 2~3명에 불과하다"며 "당선작 하나 잘 만들어서 등단할 경우 기쁨은 있겠지만 지속적으로 활동하기는 어렵다. 등단 이후에도 어떻게 쓸 것인지 충분히 습작을 한 상태에서 도전하라고 권하고 싶다"고 말했다.
내년이면 등단 20년이 되는 박형준 시인은 "신춘문예는 '신춘'이라는 말이 암시하듯 절망보다 희망을 예감하는 시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그러나 신춘문예는 시인이 되기 위해 통과해야 할 하나의 과정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되며, 등단작에는 자신의 작품세계를 관통할 수 있는 진정성을 담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용임 시인은 "두렵더라도 '문학 이외의 것을 탐하면 안 된다'는 자세를 지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사전적 의미의 시인이기보다는 '많이 외로워하는' 시인의 영혼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