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로 술향은 찬바람이 불어야 더욱 진해지는 법이다.
아스라한 그 향을 좇아서 쓸쓸한 빈 들녘을 스치고 산허리를 돌아 한참을 달려갔다. 산마루 첩첩인 경북 문경시에서도 더욱 외진 곳에 들어앉은 산북면 한두리마을에 있는 한 술도가를 찾아 나선 길이다.
마을엔 야트막한 산줄기와 넓지 않은 개울이 나란히 흐르고 있다. 그 산줄기를 등에 지고 기품 있어 보이는 고택이 서 있었다.
고택과 가까운 곳에 '호산춘(湖山春)'이란 허름한 간판이 세로로 걸려 있어 양조장 찾기는 어렵잖다. 녹슨 대문에 붙어 있는 작은 안내판엔'술이 필요한 분은 전화 주십시오'란 글귀와 전화번호 두 개가 적혀 있었다.
끼이익 쇠문을 열고 들어가니 호산춘을 만드는 황규욱(60)씨가 나왔다. 오뚝한 콧날에 호랑이 같은 눈매며 인상이 범상치 않았다. 호산춘이란 술이 만만치 않으리란 것을 제주자를 통해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영의정을 18년이나 했다는 방촌 황희 정승의 후손이다. 방촌의 증손자인 사정공이 문경 산북에 들어와 터를 잡았고 가문은 500년 넘게 세거해 왔다. 사정공파 종택의 종손인 황씨가 빚는 술이 집안 대대로 내려온 호산춘이다. 육당 최남선이 조선의 3대 명주 중 하나로 꼽았다는 술이다.
황씨의 어머니 권숙자(79)씨가 호산춘 제조 비법으로 경북도 무형문화재에 등재됐고, 황씨는 '전수생'의 자격으로 이 술을 만든다. 어머니가 3년 전부터 병환이 깊어지는 바람에 현재 병원에 있어 술 빚는 사람은 황씨 혼자다.
마당 한쪽에 있는 양조장은 크지 않았다. 밑술통 발효통 냉각판 등 술 빚는 장비들도 작았다. 황씨가 혼자서 술을 빚기 위해 특별히 주문 제작한 장비들이다.
술통엔 짜낸 지 얼마 안 된 노르스름한 술이 들어 있었다. 한 잔 떠 주는 것을 사양 않고 한 모금 머금었다. 술은 금세 혀를 휘감는데 그 움직임이 날렵하고 상쾌했다.
천사의 옷이 흩날리는 기분이랄까. 진득하고 무거운 다른 약주들과 달리 유난히 가볍고 부드럽다. 달큼하지만 끈적거리지 않았고 뒷맛이 깔끔했다. 노련한 풍미가 코를 간질였다.
입에서 부드럽게 넘어간 술은 2, 3분 지나자 뱃속을 화하게 달궈 주었다. 호산춘의 알코올 도수는 18도. 발효주로는 상당히 높은 도수다. 일반 약주의 도수는 대게 15~16도. 18도는 한산 소곡주와 호산춘만 낼 수 있다고 했다.
보통의 술과 달리 술 이름에 술 주(酒) 자 대신, 봄 춘(春) 자가 붙었다. 황씨는 "색 맛 향이 맑고 깨끗한 술에 붙이는 존칭"이라고 했다. 같은 밥이라도 밥 진지 수라는 그 품격이 다르듯 춘자가 붙은 술엔 남다른 존엄함이 있다는 것. 예전에는 약산춘 벽향춘 백화춘 한산춘 등 또 다른 춘주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호산춘 하나만 남았다고 한다.
쌀 한 되로 딱 술 한 되만 뽑을 수 있는 술이다. 예전엔 더욱 귀했던, 소수의 상류층을 위한 술이었다.
황씨 가문에 재력이 있었기에 가주인 호산춘의 명맥을 이어 왔을 것이다. 황씨의 고조부 때 집안이 번성했다. 육촌 안에 진사가 여덟 명이 있었고, 천석지기도 여덟 집안이라 팔진사 팔천석이란 말이 회자되기도 했다.
집안엔 손님이 끊이지 않았고 호산춘도 끊임없이 만들어졌다. 호산춘 때문이었는지 집안이 기울기 시작했고, 황씨의 부친마저 일찍 세상을 뜨면서 살림은 크게 어려워졌다. 그래도 제사를 지내야 하는 종택인지라 황씨의 모친은 제주인 호산춘을 계속 빚어 와 지금까지 명맥을 이을 수 있었다.
호산춘은 술밥을 2차례 나눠 담근다. 밑술과 덧술의 비율은 1 대 2. 밑술은 멥쌀로 고두밥을 찌고, 덧술은 찹쌀로 백설기를 찐다. 멥쌀과 누룩을 섞은 밑술을 7~10일 간 발효하고, 여기에 덧술을 더해선 20일을 더 기다린 뒤 술을 내린다.
말간 호산춘을 얻으려면 꼬박 한 달의 시간이 필요하다. 쌀과 누룩 외에 호산춘에 들어가는 것은 솔잎이다. 많은 솔잎을 넣은 술에선 진한 솔향이 배어난다.
문헌상 호산춘은 병 호(壺) 자를 쓴 '壺山春'이었는데 황씨가 만든 술은 호수 호(湖) 자를 쓴 '湖山春'이다. 황씨는 "호산춘은 옛 문헌이 많이 실린 유명한 술로 전북 인산시뿐 아니라 전국의 여러 집에서 빚었다"며"시간이 지나 다 사라졌고 용케 문경 땅에서 살아남은 것"이라고 했다.
시작은 익산의 호산춘을 따라 했겠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며 문경 산북의 술로 토착화했다는 것이다. 황씨가 세상에 술을 내놓기 시작하면서 문경의 맑고 깊은 산세를 담아 호(湖) 자를 쓰는 독자적 호산춘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황씨는 1991년 전통주 제조면허를 획득한 전통주 1세대다. 당시 함께 면허를 딴 술들이 면천두견주 함양국화주 경주법주 한산소곡주 등이다.
황씨는 정성스레 술을 빚지만 파는 데는 영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 흔한 판매장도 하나 없다. 호산춘에 대한'황씨 고집'때문이다. 술 팔아 떼부자될 생각 없다는 그는 술의 질을 유지할 수 있는 소량 생산만 고집한다.
양조恙?찾아오는 이들에게만 공급하지 일부러 팔러 다니지도 않는다. 미국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방한 당시 호산춘이 환영 만찬주로 지정됐을 때도 청와대에 가져다 줄 수 없으니 와서 가져가라고 배짱을 부렸던 황씨다. 술이 떨어지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문을 닫아걸기도 하고 만족스럽지 않은 술은 절대 내놓지 않는다.
뒤늦게 술 공부를 하고 있는 아들(31)에게 황씨는 "술만 사랑해야 좋은 술이 나온다. 돈을 벌려고 하면 좋은 술을 만들 수 없고 좋은 술을 유지할 수 없다"고 당부한다.
호산춘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1병(700㎖)에 1만원이다. "돈 올려 봐야 좋아할 사람 누가 있겠나. 그래도 빚 안 지고 이만큼 살고 있다"는 게 황씨의 설명이다.
그의 술 만드는 철학을 듣고 다시 한 잔 들이킨 호산춘에선 또 다른 깊이가 느껴졌다. 호산춘 (054)552_7036
문경= 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문경 묘적암·윤필암
호산춘 술도가가 있는 문경시 산북면에는 천년 고찰인 김룡사와 대승사가 있다. 이중 대승사는 윤필암과 묘적암 거느리고 있는데 두 암자를 연결하는 낙엽길이 무척이나 가을답다.
윤필암과 묘적암을 품은 산은 사불산. 산 중턱 거대한 암반 위에 서 있는 사불(四佛)바위에서 이름이 유래됐다. 이제는 거의 닳아 없어졌지만 마애불이 4면에 가득 새겨진 바위다.
<삼국유사> 가 기록하기를 붉은 천에 싸인 바위 덩어리가 하늘에서 떨어졌고 그 네 면에 불상이 새겨져 있었다. 신라 진평왕이 몸소 찾아와 예를 올리고 대승사를 창건했다. 삼국유사>
윤필암은 전통 암자라기보다 펜션같이 예쁜, 약간은 현대화한 사찰이다. 관음전 앞마당을 지나 벼랑에 서 있는 사불전에는 불상이 따로 없다.
커다란 유리창을 사불바위 쪽으로 냈다. 창밖 사불바위를 모신 법당이다. 법당 안에 들어가 허리를 굽히면 사불바위를 우러를 수 있다.
사불바위에서 바라보면 윤필암을 감싼 산세가 참으로 아늑하다. 이제 절정으로 치닫는 단풍도 곱게 내려앉았다. 윤필암은 현재 20여명의 여승들이 수도하고 있는 비구니 참선도량이다.
윤필암에서 묘적암으로 오르는 길은 호젓하다. 주변의 숲은 깊고 나무들은 높다. 이따금 바람이라도 불면 황토색 낙엽비가 쏟아져 내린다.
5분 가량 오르면 오른쪽으로 돌계단이 놓여져 있다. 계단 끝에 6m 높이의 거대한 마애불이 있다. 가부좌를 튼 마애불은 눈을 지긋이 감은 채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묘적암 가는 마지막 모퉁이를 돌기 전 길가에 약수터가 보인다. 묘적암은 고려 말의 나옹 선사가 출가한 곳이다. 성철 스님, 서암 스님 등 현대의 고승들도 깨달음을 얻고자 오랜 기간 머물렀던 곳이다. 나옹 선사가 이 약수를 떠서 끼얹어 멀리 해인사의 불을 껐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약수터 오른쪽 산기슭에는 부도가 2개 있다. 처음 것은 기우뚱한 모습인데 뒤쪽의 것은 좀더 의젓한 모습으로 서 있다. 앞에 것은 동봉 선사, 뒤쪽은 나옹 선사의 부도라 한다.
마지막 모퉁이를 올라서면 낙엽길의 하이라이트다. 두툼한 낙엽 카펫과 은행나무가 어우러져 늦가을의 서정을 그려 댄다. 묘적암은 여느 시골집 같은 분위기로 토담에 소박한 대문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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