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 시커멓게 타 들어간 속만큼이나 검은 흙을 한 줌 움켜 쥔다. 아버지의 뼈와 살이 녹아 있는 그 흙을 얼굴에 갖다 대어본다. 시나브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아버지, 당신께서 마지막 숨을 거두신 이역만리 땅에 이제야 왔습니다. 이제야 왔어요. 너무 늦어서…."
지난 18일 오전 괌의 북동쪽, 북마리아나 제도 남단에 자리잡은 로타 섬. '일제 강제동원 한국인 희생자 합동추도제'에 참석한 이정숙(66·여)씨는 추도사 도중 말을 잇지 못한 채 울먹였다.
그는 그 상황에서도 자신이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강제 징용됐다가 숨진 부친의 빛 바랜 흑백사진을 보듬으며 계속 "아버지"를 읊조렸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유족들도 저마다 그동안 가슴 한 켠에 묻어두었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쏟아내며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추도제에 참석한 유족은 모두 20명. 이들은 일제에 의해 군인과 군속(군무원), 노무자 등으로 강제 징용됐다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영토였던 괌과 사이판 일대에서 숨진 희생자들의 아들, 딸이다.
유족 중 최고령인 김재승(80)씨는 자신이 열 세 살 때 부친이 끌려가던 모습을 기억하며 "한 평생 '아버지'란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한 설움을 누가 알겠냐"며 "나는 얼굴이라도 기억하지만 60대인 나머지 유족들은 아버지가 징용될 당시 모두 갓난아이나 유복자였다"고 말했다.
해외 순례 추도제가 시작된 것은 2006년. 국무총리 소속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 주관으로 매년 세 차례 한 번에 20명의 유족이 강제징용 희생자가 많았던 지역을 찾아 합동으로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지금까지 로타 섬을 포함해 러시아 사할린, 중국 쿤밍(昆明), 인도네시아 수라바야 등 12곳을 찾았다. 참가 유족은 신청자 가운데 추첨을 통해 선발하며, 유족들의 항공비와 숙박비 등 모든 비용은 한국과 일본 정부가 반반씩 부담하고 있다.
올해 마지막 해외 순례 추도제는 18일 로타에 앞서 17일 괌에서도 열렸다. 특히 괌 추도제에는 시미즈 세이스케 하갓야 일본 총영사관 수석영사가 참석, 일본 정부를 대신해 애도의 뜻을 전했다.
그는 추도사에서 "진심으로 위령의 뜻을 표하는 동시에 한국과의 친선을 위해 노력할 것을 맹세한다"고 말했다. 추도사 후 그는 유족들에게 깊이 고개 숙였고, 유족들은 목례로 답했다.
진상규명위 조규석 팀장은 "지금까지 240명의 유족이 해외 추도제에 참석했는데 이는 일본이 밝힌 피해자 2만여명과 비교해도 아주 적은 숫자"라며 "앞으로도 행사를 이어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국 정부는 2004년 11월 발족한 진상규명위를 통해 해외 순례 추도행사와 함께 일제 하 강제동원 피해와 관련된 국내외 자료수집과 진상조사, 유해 발굴 및 수습 등 업무를 진행하고 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혹독했던 역사가 안겨준 시련을 견뎌야 했던 유족들의 사연은 애절했다.
경북 영천에서 나고 자란 이복생(67)씨는 "해방이 됐지만 아버지 생사도 모르는 상황에서 전쟁까지 터져 먹고 살 길이 막막해 소학교(초등학교) 시절부터 몇 년간 남의 집 종살이를 했다"며 "주인집이 친일파라 너무 억울하고 분했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어쩔 수 없었다"고 울먹였다.
전북 김제가 고향인 이정숙씨도 "어릴 때는 매일 할아버지와 함께 김제 역에 나가는 게 일이었다"며 "열차가 들어올 때마다 혹시 아버지가 내릴까 마음 졸이며 3년을 기다렸지만 결국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광주에 사는 최명수(65)씨는 몇 해 전 세상을 뜬 어머니 생각에 더욱 가슴이 저린다고 했다. "자식이라고는 나 하나 낳고 아버지가 끌려갔을 때 어머니 나이가 스물 한 살이셨어요. 결국 어머니는 불교에 귀의해 비구니로 살다가 3년 전 한 많은 삶을 마감하셨지요."
유족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유골과 위패의 국내 송환. 아버지들이 죽어서도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더욱이 위패가 일제 전범들과 함께 모셔져 있는 현실이 안타깝고 억울하다고 했다.
태평양전쟁 당시 한국인 희생자 중 아직까지 일본 도쿄의 사찰 유텐사(祐天寺)에 봉안돼 있는 유골(군인ㆍ군속)은 500여위,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에 모셔진 국내 희생자 위패는 2만1,000여명에 이른다.
부친 위패가 야스쿠니신사에 모셔져 있다는 김재승씨는 "일본까지 직접 가 위패 송환을 위해 노력해봤지만, 일본 정부로부터 국가간에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답변만 들었다"며 "죽기 전에 해결하고 싶은데 그럴 수 있을 지 모르겠다"고 울먹였다.
유족 김기환(70)씨는 "아버지가 눈 감으신 이 곳 흙이라도 한 삽 떠가고 싶지만 세관 심사에 걸린다고 해 포기했다"?"정부가 나서 기념관이라도 하나 만들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로타=이태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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