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진 지음/왕의서재 발행ㆍ412쪽ㆍ2만3,000원
고려 마지막 왕 공양왕은 이성계에 의해 폐위돼 공양군으로 강등된 뒤 원주로 유배된다. 다시 간성을 거쳐 삼척으로 도망갔다가 그곳에서 1394년에 숨졌는데 '조선왕조실록'에는 교살됐다고 적혀 있다. 더 자세한 기록이 없어서 공양왕이 어떻게 죽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의 죽음과 조금은 관련됐을 것 같은 나무 한 그루가 지금의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에 있다.
궁촌(宮村)이라는 예사롭지 않은 이름의 마을에 있는 키 20m의 음나무. 마을에는 이 나무 앞이 당시 공양왕이 머문 집 마당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흔히 음나무가 귀신과 불행을 막아준다고 하는데, 공양왕은 이곳에서 한 달 남짓 지내다 나무의 효험을 보지 못한 채 비극적인 죽음을 맞고 말았던 것이다.
세력을 키우며 새 왕조 건설에 나선 이성계는 조선을 세우기 전 전국의 이름난 산을 찾아 산신께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자신이 세우려는 왕조가 영원하기를 기원한 것이다. 그러나 광주 무등산의 산신만은 그의 기도에 응하지 않았다. 화가 난 이성계는 무등산 산신을 지리산으로 귀양 보내고, 산 이름도 무정한 산이라는 뜻에서 무정산(無情山)으로 바꿨다. 그렇지만 마음이 개운치 않았던지 그는 무등산을 떠나면서 인근 담양의 한재마을에, 당장이 아니라 훗날에라도 소원을 들어달라는 염원을 담아 느티나무 한 그루를 정성스럽게 심었다.
우리나라의 나무에는 많은 사연이 담겨 있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전설인지 경계가 모호하지만 우리가 이따금 만나는 고목에는 이처럼 선인의 삶과 역사가 함께 한다. <우리 문화재 나무 답사기> 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고목과, 거기에 깃든 여러 이야기를 모은 책이다. 우리>
어디나 그렇듯 비운의 인물일수록 이야기가 많은 법. 삼촌 수양대군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난 비극의 주인공 단종과 관련해서는 두 종류의 나무가 등장한다. 단종은 수양대군에 의해 1457년 영월 청령포로 유배된다. 그곳에는 다른 나무를 압도하는, 키 30m의 우람한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열여섯 살 어린 단종은 그 소나무에 걸터앉아 서울을 보며 통곡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무는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지켜보고 슬픈 소리를 들었다 해서 관음송(觀音松)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관음송에 기대 슬픔을 달래던 무렵, 청령포 일대에 홍수가 나자 단종은 읍내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긴다. 그때 부근 언덕의 은행나무에서 은행 몇 알을 따 자신의 운명을 점쳤다고 한다. 점괘가 어땠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거처를 옮긴지 얼마 안 돼 사약을 받고 한많은 짧은 생애를 마친다. 방치됐던 단종의 시신은 영월 호장 엄흥도가 수습했는데 그는 은행나무를 심은 엄임의의 12대 손이었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는 엄흥도와 함께 이 은행나무를 절개와 의리의 상징으로 여긴다.
책에는 이밖에 최치원이 함양 태수로 있을 때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 조성했다는 상림, 김종직이 다섯 살 아들을 잃고 슬픔을 이기기 위해 심었다는 느티나무, 곽재우가 북을 걸어놓고 의병을 훈련시켰다는 현고수(懸鼓樹) 느티나무, 이언적이 자신의 건강을 보살피기 위해 심은 조각자나무, 김정희가 청에서 가져와 고조부 김흥경의 묘소 앞에 심은 백송 등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나온다. 나무를 매개로 역사 속 인물과 역사적 사건을 만날 수 있다.
저자인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는 목조 문화재 권위자로 이 책은 그의 14년 답사의 결과물이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전국 250여개의 나무 및 숲 가운데 역사ㆍ문화적 가치가 높은 73개를 골라 현장을 방문하고 사진을 찍어 책을 완성했다.
수백년 심지어 1,000년 이상을 살면서 이들 나무는 역사의 소용돌이와 함께했다. 때로는 웃음이 나오고 또 때로는 눈물이 나오는 여러 사건들을 그저 묵묵히 바라본 나무들은 이제 구전의 산실이 돼 역사의 빈틈을 채우는 이야기의 원천이 되고 있다.
박광희 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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