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프로그램에서 한 여대생이 내뱉은'키 180 이하인 남자는 루저'라는 발언이 일파만파로 우리 사회에 강력한 담론의 장을 형성하고 있다. 이 발언으로 상처를 입었다는 '루저'들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이 줄을 잇고, 연예인 등의'나도 루저다''루저가 이상형이다'라는 말이 인터넷을 달군다. 루저. looser. 우리 말로는 실패자 정도로 풀이되지만, 문제의 발언을 한 여대생은 유독 실패자라는 말 대신 루저 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쯤 되면 사람 무시도 미국식이 더 좋은가.
루저라는 말을 처음 접한 것은 할리우드 영화를 보고 난 직후였다. 여자 주인공이 남자 친구와 헤어지면서 엄지와 검지로 대문자 L자를 만드는데 그게 Love의 L이 아닌 Looser의 L이란 의미라는 거였다. 참 이상했다. 실패한 게 뭐 그리 나빠서 저렇게 실패라는 단어를 대놓고 심볼까지 만드나. 미국 사람들은 정말 실패자가 되는 게 두려운가 보다. 이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패배나 패자에 대해 우리나라처럼 관대한 나라 또는 문화권도 별로 없을 것이다. 미식 축구에서는 터치다운 직후에 보너스 킥을 한번 더 찰 수 있게 해 준다. 즉 성공을 했으니, 성공한 유능한 사람에게 한번 더 기회를 주는 게 공평하다는 의미일 게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반대로 생각을 한다. 씨름 같은 민속경기에서 보면 패자 부활전을 치른다. 성공한 사람에게 한번 더 기회를 주는 것 보다 실패한 사람에게 한번 더 기회를 주는 게 더 공평한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winner takes it all', '승자가 모든 것을 갖는다'는 표현이 별다른 거부감 없이 쓰이지만, 우리는 원래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고 하지 않는가.
이러한 전통에 비춰 보면, 루저 발언은 이제 우리 문화권에서조차 점점 '1등 주의'아니면 '승자 독식'원칙이 무의식 속에 각인되는 현상을 목도하는 것 같아 여간 씁쓸하지 않다. '키 작은 남자가 루저'라는 발언에서 어느덧 서구식의 성공 지상주의 문화가 이식된 우리 사회의 그늘을 보게 되는 것이다.
순진하게 말하면, 나는 살벌한 초싸움 경쟁을 벌이는 퀴즈게임 보다 '패자 부활전'이 있는 퀴즈 프로그램이 더 맘에 든다. 그리고 진정 중요한 것은 실패보다 실패에서 다시 일어서는 오뚜기 같은 힘에 있다고 믿는다. 호기심, 창의성, 선의 같은 인간의 모든 잠재력 중에서 가장 든든한 빽이야 말로 실패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탄성력(resilience)'이라고 긍정 심리학자들은 입을 모은다.
그러니 키 작으신 분들 이제 흥분 좀 가라 앉히고, 철없는 여대생 발언에 마녀사냥은 그만 하자. 그보다는 '승자'만을 기억하는 이 사회의 부작용, 루저라는 단어를 점점 두려워하는 이 사회의 깊은 심연을 들여다 보자. 늘씬한 키와 주먹만한 얼굴만을 강조하는 외모 지상주의 사회에서 진정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은 뼈 뜯어 고치고 없는 키 늘이는 외형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보다는 환한 가랑이 사이로 경계의 금을 넘어서는 일이다 .
지금이야 말로 '루저냐 아니냐'라는 패러다임 안의 생각에서 빙빙 맴돌기 보다, '누가 루저와 위너라는 이분법적 금을 만들었는가'라고 패러다임 자체에 대한 질문을 해야 할 때이다.
심영섭 영화평론가·대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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