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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숙 칼럼] 키 작은 남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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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숙 칼럼] 키 작은 남자들

입력
2009.11.17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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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달구고 있는 '루저(loser)의 난'을 보고 있으니 대학 시절이 생각납니다. 한국방송(KBS2)에 출연한 여대생이 키 180cm가 되지 않는 남자는 '루저'라고 하여 '루저의 난'을 촉발했다는데, 공영방송에서 '패배자'라는 우리말을 두고 영어 단어를 쓴 것도 못마땅합니다.

대학에 가지 못한 분들께는 미안하지만, 대학 시절은 힘겨웠습니다. 캠퍼스는 유신 헌법 덕에 정치의 포로였고, 하기 싫은 아르바이트를 해서 등록금에 보태느라 동동거렸습니다. 또래 여성의 7%만 대학에 진학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운 좋게 대학생이 된 사람으로서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도 많았습니다. 그나마 즐거운 일은 도서관에서 오래된 책을 읽는 것과 가끔 하는 미팅이었습니다.

사람 공부했던 만남

미팅을 하는 날은 굽이 없는 신발을 신고 갔습니다. 키 작은 상대를 만날지도 모르니까요. 겨우 스무 남짓 나이에도 가치관과 습관이 너무도 다른 사람들, 만남은 곧 배움이었습니다. 마지막 미팅에는 여자 하나가 부족해 두 남자 중 한 사람을 선택해야 했습니다. 친한 친구 사이라는 두 사람이 다 좋아 보였지만 더 낯익은 사람 옆에 앉았습니다. 평생 동행이 된 그의 키가 함께 있었던 친구의 키보다 작다는 건 먼 훗날에야 알았습니다.

시간이 흘러 미래가 과거가 되었어도 삶은 여전히 책과 현실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로 이루어집니다. 키 작은 사람, 키 큰 사람, 마른 사람, 뚱뚱한 사람, 늙은 사람, 젊은 사람, 보이는 장애가 있는 사람, 보이지 않는 장애가 있는 사람…. 어렴풋이 깨달은 건 몸은 정신을 담는 그릇이며, 그릇의 크기나 모양은 정신의 크기나 됨됨이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외모가 다르고 하는 일이 다르듯이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제작자에 따라 크게 다릅니다. 지난 8월 큰 키를 강요하는 사회를 고발하는 '키 크기 전쟁'을 방영했던 '그것이 알고 싶다' 같은 프로그램이 있는가 하면, 천박한 문화의 나팔수 노릇을 하는 프로그램도 있습니다. 이번에도 프로그램 제작진이 대학생답지 못한 대학생의 발언을 편집 과정에서 삭제했으면 '루저의 난'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결과적으론 그 말이 그대로 방영된 게 잘 된 일이지만요.

프로그램 제작진이 교체되었다고 하지만, 대중매체의 외모지상주의와 선정성 추구는 여전히 계속될 거고, 문제를 야기한 학생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여전할 겁니다. 그러므로 지금 정당한 분노에 휩싸인 '루저'들이 해야 할 일은 그 학생 개인을 공격하는 게 아니라, 텔레비전 프로그램, 나아가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한 외모 강박을 깨부수어 '난'을 '혁명'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클로즈업 화면과 성형미인의 출연을 제한하고, 미용 성형을 합리화하고 부추기는 프로그램을 퇴출시키며, 단지 키가 작거나 미모가 아니라는 이유로 불이익을 주는 법령과 관습을 없애도록 압력을 가해야 합니다. 또한 '루저'들 스스로 천박한 기준에 맞추기 위해 키를 억지로 늘리거나 얼굴과 몸매를 고치는 대신 자신을 금강석 같이 단단하고 아름다운 사람으로 연마하는 데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금강석은 예쁜 그릇에 담든 소박한 그릇에 담든 금강석이니 말입니다.

'루저'들이 해야 할 일

한국인의 키는 이미 정점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18세 청년의 평균 키는 1985년 168.9cm에서 1998년 172.5cm로 껑충 자랐지만, 2007년엔 173.4cm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사춘기가 빨라져 아이들의 키가 일찍 자랄 뿐 성년의 키는 별로 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사회를 이루고 이끄는 사람은 대부분 '루저'일 겁니다. 큰 키는 큰 그릇과 같아 채우기 힘듭니다. "키 큰 사람은 싱겁다"는 옛말도 그래서 나왔을 겁니다. 부디 '루저들의 혁명'이 성공하여 이 나라의 품격이 회복되기를 고대합니다.

김흥숙 시인·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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