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는 작가, 이만희씨가 유일하게 '가차없이' 쓴 작품입니다." 연출가 강영걸(66)씨는 "옳은 일 하는 자들이 불편하고, 도리어 나쁜 인간들만 잘 사는 사회가 '내 탓이오'를 깨닫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연출의 변을 달았다. 원로 연극인들이 21세기 한국 사회의 풍속도를 내놓았다. 강씨가 '해가 져서 어둔 날에 옷 갈아 입고 어디 가오'를 통해 한국의 치부를 여과 없이 압축한다면, 극작ㆍ연출가 오태석(69)씨는 '춘풍의 처'와 '분장실' 등 무대 둘을 동시에 펼쳐 보인다.
경기도립극단의 '해가 져서 어둔 날에…'는 정통 리얼리즘 무대의 힘으로 충만하다. 일제강점기 말 작은 섬마을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다루는 이 무대는 1990년 초연된 작품인데, 이만희씨의 개작 작업 덕에 지금 이곳을 착탄점으로 삼는다 해도 좋으리만치 일신했다. 특히 일본인에 대한 묘사는 시대의 벽을 단박에 뛰어넘는다. 이 무대를 이 시대 정치ㆍ경제의 지도자들이 봐야 한다고 강씨가 강조하는 이유다.
"조선놈은 절대로 일본의 적수가 못 돼. 자기네끼리 지지고 볶고…" "진짜 투사는 따르지 않는데, 가짜 투사가 넘친다" "안중근 윤봉길이 수천 수만은 나와야 돼" 등 일본인들이 한국을 보며 뇌까리는 대사는 바로 우리 시대를 겨냥한 말이다.
등장 인물이 30여명에 달하는 이 무대는 또 왜소화돼 가는 21세기 연극에 대한 자성이자, 인간들이 살아 숨쉬는 무대의 힘을 입증할 기회이기도 하다. 강씨는 "지난 5월 경기도립극단이 수원에서 펼쳤던 무대를 훨씬 보강한 것"이라며 "배우의 개성이 더 드러나게 작가의 동의로 원작에 대폭적인 수정을 가했다"고 말했다. 특히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광수 역의 배우 이찬우는 50대가 펼칠 수 있는 중후한 연기의 맛을 선사할 것이라는 기대다. 21~29일(화~금 오후8시, 토 4시 7시, 일 4시), 대학로예술극장. (02)3668-0029
오태석씨의 목화레퍼토리컴퍼니는 일본 극작가 시미즈 쿠니오의 '분장실'에서 없이 사는 이웃을 무대로 불러낸다. 고락을 함께 한 4명의 여배우들이 막 오르기 전 분장실에서 펼치는 정경이다.
우리 말과 몸짓에 대한 오씨의 천착은 여전하다. 현대극이지만 특유의 4∙4조 운율이 은근히 스며있고, 배우들의 몸짓은 일손을 잠시 놓고 넋두리하는 아낙들을 닮았다. 이 극단의 무대답지 않게 러시아 음악, 브레히트적 어법에 갖가지 오브제를 동원해 동시대를 무대에 삼투시키는 오씨의 숨은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조은아, 장은진 등 출연. 12월 18일부터 내년 1월 31일까지, 디마떼오홀.
1976년 초연된 '춘풍의 처'는 탈춤과 꼭두각시의 미학을 적극 동원한 이 극단의 대표작으로, '분장실'의 대극에 있는 무대다. 삶과 죽음을 해학과 능청으로 오가는 무대는 멍석 한 장 깔아놓으면 그대로 판이 되는 우리 특유의 미학을 입증한다.
이번 무대에서 오씨는 판을 유희 쪽으로 바싹 잡아당겼다. 춘풍의 처와 남편 춘풍을 호린 평양 명기 추월의 힘겨루기, 그들과의 인연에 얽혀 지상으로 올라온 미물들이 서로 주고 받는 것은 우스개와 신명의 몸짓이다. 갈수록 메커니즘과 판타지에 기대는 공연예술계에 생략과 비약이라는 전가의 보도를 잊지 말자고 충고하는 무대이기도 하다. 정진각, 강현식 등 출연. 12월 5~31일(화~목 오후8시, 금∙토 4시 8시, 일 4시), 대학로예술극장 제4관. (02)745-3966
장병욱 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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