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오후 충북 청주시 흥덕구 사창동 청주시보훈회관 회의실. 60, 70대 할아버지, 할머니 20여명이 하나 둘 자리를 잡더니 들고 온 가방을 뒤적였다. 책상 위에 올려놓는 것이 모두 영어 책과 영어 사전이다. 이내 영어 읽는 소리로 실내가 시끄러워졌다. 백발이 성성한 한 할아버지가 기자에게 귀띔했다. "오늘 단어 시험이 있어."
잠시 후 회의실 문이 열리고 노신사 한 명이 들어오자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일제히 큰 소리로 인사를 했다. "하이, 영 브라더(Hi, Young brother)!" 노신사는 한 손을 번쩍 들어 반갑게 답례했다. "굿 애프터눈(Good Afternoon)!" 할머니 제자들에게 '젊은 오빠(영 브라더)'로 통하는 영어 선생님 안태영(82)씨다.
지난 주 내준 영작문 숙제 검사에 이어 수업이 시작됐다. "오늘은 교과서 진도를 나가기 전에 '영어로 말하는 사랑의 밀어'를 알아보고 갑시다." 안씨는 칠판에 영어 애정표현을 죽 써내려가다 문제를 던졌다. "'내 곁에 있어줘요. 꼼짝도 하지 말고'를 영어로 어떻게 말하는지 아세요?" "…." "간단해요. '스틱 위드 미(Stick with me)'라고 속삭이면 돼. 여러분도 사랑하는 연인한테 한 번 써먹어 보라구." 할머니들이 얼굴을 붉히며 까르르 웃었다.
이날 모인 학생들은 청주지역 노인 영어동아리 '보셈반' 회원들이다. 보셈은 보훈회관의 앞글자와 'Senior English Members'의 머릿글자를 합성한 것. 이들은 지난해 봄부터 안씨에게서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반장 정소섭(73ㆍ여)씨는 "영어 수업이 하도 재미있어서 2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 모른다"면서 "선생님이 목소리도 크고 제스처도 열정적이어서 우리 제자들이 '젊은 오빠'라고 별명을 지어줬다"고 했다.
안씨가 노인들에게 영어 가르치는 봉사를 시작한 것은 7년 전. 흥덕구 가경동의 청주 노인복지마을로 역학을 배우러 다니던 그는 노인들이 의외로 영어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이든 사람들도 글로벌 시대를 맞아 영어를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공부할 방법도 모르고 마땅히 배울 곳도 없어 답답해 하더군요."
안씨는 한국전쟁 당시 군대에서 미군과의 연락 장교로 복무하다 전쟁 후 국비 유학생으로 미국 텍사스의 한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했다. 그의 영어 실력을 익히 알고 있던 노인복지마을 친구들은 영어 동아리를 꾸리고 그에게 교사가 돼 달라고 졸랐다.
그는 먼저 노인 눈높이에 맞는 교재부터 만들었다. "어떻게 하면 영어를 쉽게 받아들이게 할까" 궁리한 끝에 사람, 동물, 가재도구 등 일상생활에서 가깝게 접하는 것을 활용해 다양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교과서에 중점적으로 담았다.
다양한 표현을 통해 자연스레 문법과 회화를 익힐 수 있도록 외국 교과서 등 각종 자료 수 십 권을 참고해 예문을 뽑아냈다. 그가 자비를 들여 만든 문고판 만한 교재는 'Let's Learn English –step by step'. 어학 공부는 한 발 한 발 꾸준히 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이름을 붙였단다.
안씨는 학생들이 흥미를 돋우기 위해 수시로 유용하고 재미있는 내용의 유인물을 만들어 뿌리기도 한다. 수적으로 많은 할머니들을 위한 내용이 많은데, 그 중 '콧대 높은 며느리 납작하게 만드는 시어머니의 영어'가 단연 인기다. 여기에는 무, 배추, 파, 마늘, 된장, 식초, 참기름, 고등어 등 시장에서 파는 물품 60여가지의 영어단어와 쇼핑용 회화가 실려있다.
전분남(74ㆍ여)씨는 "장보러 갔다가 가끔 나도 모르게 영어단어가 튀어나오면 며느리가 놀란다"며 "해외 여행 가면 실력을 보여줄 참"이라고 웃었다.
노인복지마을이 있는 가경동의 머릿글자를 딴 '가셈반' 회원 15명은 안씨와 7년여 함께 하면서 상당한 영어 실력을 쌓았다. 대부분 영어로 간단히 대화할 수 있는 수준이 됐고, 일부는 영어로 일기를 쓴다.
가셈반 소문이 나면서 보훈회관에 다니는 노인들이 만든 영어동아리가 바로 보셈반이다. 보셈반 송세헌(76)씨는 "선생님 강의는 쉽고 재미있어서 좋지만 무엇보다 자상한 형님 같아서 더 좋다"고 말했다.
안씨는 매주 목요일 오전에 청주 노인복지마을에서, 오후에는 청주 보훈회관에서 각각 2시간씩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영어를 가르친다. 나머지 시간에도 더 좋은 교재와 강의를 준비하기 위해 전문 영어강사를 찾아 공부하고 도서관에서 책과 씨름한다.
만학도들을 격려하기 위해 'He can do, she can do, why not me?(그도 되고 그녀도 되는데, 나는 왜 안돼)'란 말을 자주 강조한다는 안씨는 "나이 들어서 어려운 공부를 신명나게 하는 모습을 보면 내가 더 즐겁고 신이 난다"고 말했다. 그는 이날 수업 말미에도 동년배 노인들에 대한 격려 한마디를 잊지 않았다. "Even now it's not too late.(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글·사진 청주=한덕동기자 dd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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