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국내 최대 공기업 한국전력에 창사 이래 가장 파격적인 인사 실험이 이뤄졌다.
예년 이맘때면 정기승진 심사를 앞두고 관행적인 인사청탁 잡음으로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올해는 달랐다. 우선 승진심사위원회 구성부터 180도 바뀌었다.
심사위원은 과거엔 사장이 직접 고위임원 중 몇 명을 임명하면 됐지만, 올해에는 본사 및 지방본부 차장 이상 4,500여명 가운데서 컴퓨터 추첨을 통해 무작위로 뽑아냈다. 심사과정도 007작전을 방불케 했다.
선정된 심사위원들은 통보받은 당일 한전연수원에 들어가 휴대폰을 반납하고 독방에 갇혀 하루 종일 외부와 일체 연락을 차단당한 채 승진후보자들을 평가했다. 심사위원들에게 주어진 건 컴퓨터에 미리 입력된 승진후보자들의 업무실적, 이력 등의 정보뿐이었다. 인사 청탁이 발 붙지 못하게 하려는 시도였다.
'한전이 뒤집혔다'는 외부 반응이 나올 정도로 한전이 변화하고 있다. 한전은 지난해 글로벌 금융위기, 고유가 등의 여파로 올 상반기까지 경영실적에선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그동안 한전은 투명 경영을 강화하는 등 기업 혁신에서는 창사 이래 가장 독보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
이같은 변화의 중심에는 한전 최초의 민간 출신 최고경영자(CEO)로 지난해 8월 취임한 김쌍수 사장이 있다. 김 사장은 취임 한 달 만에 '윤리경영'을 선포하며, "국민의 신뢰와 존경을 받는 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해 차원 높은 투명성을 요구하는 사회적 목소리에 부응하는 청렴문화 구축이 중요하다"며 "윤리경영 및 청렴도와 관련해 문제가 발생하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중 문책하겠다"고 밝혔다. 올 초 신년사를 통해서도 "혁신기업으로 거듭나야 공기업이라는 무사안일한 이미지를 떨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1월 실시된 보직인사부터 변화는 시작됐다. 공기업 최초로 드래프트 방식의 무한경쟁 보직제도를 도입한 결과, 본사 처ㆍ실장과 사업소장 등 핵심 간부 76%가 교체됐고 전체 팀장급에서는 40%가 새 사람으로 바뀌었다. 최상위 직급인 1급 중에선 52명이 경쟁에서 밀려나 보직을 받지 못했다.
한전의 경영 효율화 및 체질 선진화를 위한 시도는 인사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경영혁신 태스크포스의 일종인 'TDR'(Tear-Down & Redesignㆍ시스템이나 제품의 문제를 파헤쳐 전면 재검토함으로써 근본적인 원인 등을 분석해 새로운 방법으로 재구성하는 경영기법)을 도입, 변전소 컴팩트화 등의 혁신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겨 1,117억원의 비용을 절감했다. 통합사업본부를 발족하는 등의 조직개편으로 정원 616명을 감축했다.
직원들의 혁신 역량을 높이기 위한 의식개혁프로그램 ACT(Action & Change Training) 교육을 통해, 1,200여명의 한전 직원들이 혁신문화 정착을 위한 정신 무장을 했다.
비즈니스 프로세스를 고객지향적으로 고쳐나가는 것도 기업 내 '투명 경영' 확산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한전은 300만원 이상의 수의계약, 일반경쟁계약 등 계약 전 과정을 전자입찰시스템(SRM)을 통해 수행, 입찰참가 신청부터 계약체결, 보증서 납부, 계약실적증명서 발급 등 모든 계약 과정을 방문 없이 처리하고 있다. 또 입찰공고, 개찰 등 계약업무 전 단계에 걸쳐 실시간으로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있다.
한전은 윤리경영 차원에서 특히 노사상생을 강조하고 있다. 1996년 공기업 최초로 윤리강령을 도입했고 그룹사 및 협력회사 윤리기준을 제정하는 등 투명경영을 확산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지난해에는 노조와 합동으로 윤리경영을 선포했다.
한전은 정부가 지난 6월 발표한 '2008년 공공기관 경영실적평가'에서 'A' 등급을 받는 등 2년 연속 평가대상 기관 중에서 최우수 평가를 받았고, 정부가 주관한 공기업 고객만족도 조사 결과에서도 역시 올해 '우수' 등급으로 10년 연속 최고 등급을 기록했다.
문향란 기자 iam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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