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달변이었다. 말 잘하고 영리하다는 평가는 익히 들었고 이미 확인도 했지만 또 다시 대면하니 "역시나"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손예진이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 '백야행: 하얀 어둠 속을 걷다'로 1년 만에 극장가를 다시 찾는다. 일본 추리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베스트셀러 소설 '백야행'을 밑그림으로 삼은 이 영화에서 그는 환한 미소 뒤에 피로 물든 가슴 아픈 과거와 현재를 감춘 여인으로 변신한다. 12일 서울 삼청동에서 마주한 손예진은 청산유수의 답변으로 새 영화와 맡은 배역을 소개했다.
그가 맡은 미호라는 배역의 이름부터가 심상치 않다. 흐릿할 미(迷)에 호수 호(湖). 안개에 휩싸여 시계제로인 호수처럼 심중을 알 길 없는 미호는 미스터리 그 자체다. 그의 주변을 맴돌며 살인마저 불사하는, 역시 정체를 알 수 없는 요한(고수)의 모습은 미호의 정체에 의문부호를 연달아 더한다.
영화는 형사 한동수(한석규)의 눈을 통해 사랑 이상의 감정으로 맺어진 미호와 요한의 과거를 탐색한다. 그리고 점차 시간의 봉인을 뜯으며 관객을 온갖 죄악으로 점철된 충격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
손예진은 "미호는 대사도 적고 행동의 폭도 좁았다. 마치 손발이 꽁꽁 묶인 채 연기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미호는 미세한 얼굴 근육의 떨림과 눈빛의 흔들림 만으로 감정과 심리 상태를 전달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손예진은 "촬영장에서 박신우 감독이 '입술을 조금 더 떨어야 한다' '눈의 각도를 달리 하라' 할 정도로 장면마다 힘 조절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여느 배우라면 연기에 대한 부담감에 손사래를 치며 마다했을, 그만큼 매혹적인 미호는 시나리오가 나오기 전부터 손예진의 몫이었다. 제작사 폴룩스픽쳐스의 안은미 대표와 임지영 프로듀서는 '백야행' 판권을 사자마자 "손예진이 아니면 안 된다"며 3권짜리 소설을 보내왔다. 손예진은 "책 속의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너무나 소름 끼쳤다"고 말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 가슴에 품으며 애정을 지닌 역임에도 그는 "너무 힘들어서 촬영이 끝나자마자 바로 다 잊었다"고 했다.
손예진은 미호가 되기 위해 알몸 연기도 불사했다. "대역을 왜 쓰지 않았냐"고 묻자 대뜸 "쓰면 뭐해요. 어차피 제 모습인데요"라고 답했다. "대역 쓰려면 차라리 안 찍는 게 낫죠"라고도 했다. 그는 "소설을 읽으며 특히 소름이 끼쳤던 것은 미호의 몸인데, 그 몸이야 말로 미호의 아픔을 가장 온전하게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아무리 연기에 몰입한다 해도 부담 없이 알몸으로 카메라 앞에 설 여배우가 얼마나 있을까. 그는 "배우도 여자인데…촬영 전 3일 동안 밥도 못 먹고 고민했다"고 말했다. "과감한 노출을 진정한 여배우로 거듭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솔직히 저도 영화가 완성되기 전 속상했어요. '손예진 또 벗었다' 이런 기사 보며 마음에 상처가 생겼죠. 다음엔 그런 얘기 안 나오는 영화에 출연하겠다는 생각까지 했어요."
그의 차기작은 아마도 멜로가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는 "아직 출연작이 정해지지 않았다"고 했지만 "절절하면서도 말랑말랑한 내용의 사랑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멜로는 제 연기의 고향인 동시에 영원한 로망이에요. 설마 관객들이 '손예진은 이제 멜로를 하지 못해' 이러시진 않겠죠."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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