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박승의 고난속에 큰 기회있다] <20> 사우디아라비아로 가다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박승의 고난속에 큰 기회있다] <20> 사우디아라비아로 가다

입력
2009.11.17 01:36
0 0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1974년 가을 두 군데서 일자리에 대한 오퍼가 왔다. 하나는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으로 있던 이경식씨로부터 비서실에서 함께 일하자는 것이었다. 내가 한국은행 조사부에서 국민소득을 추계할 때 그 분 바로 밑에서 일을 해서 내가 믿고 따랐던 분이며 그 후 그분은 경제부총리와 한은 총재를 역임했다.

다른 하나는 경제기획원에서 내게 사우디아라비아로 가달라는 것이었다. 그 때는 오일 쇼크로 온 세계가 불황을 겪고 있을 때였는데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한 최규하 대통령특사가 경제개발자문단을 보내기로 그 나라 정부와 합의 했으니 자문단을 이끌고 가달라는 것이었다. 그 때 경제기획원 장관은 남덕우씨였는데 기획국장 김재익씨를 통해 이 요청이 왔다.

나는 숙고한 끝에 사우디아라비아에 가기로 했다. 그것은 이 나라가 우리와는 반대로 인구는 적고 자원은 많은 나라여서 이러한 나라의 경제개발을 체험하고 싶어서였다. 모두들 이 나라는 살기 어려운 곳이라 하기에 도서관에 가서 찾아 보았다.

날씨는 덥고 술도 없고 여자들은 차도르로 얼굴을 가리고 다닌다는 등 우리에게는 생소한 사실들을 알게 되었지만 거기도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로서 생활여건은 문제 삼지 않기로 했다.

그리하여 나는 75년 4월13일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로 떠났으며 그 뒤 집사람과 두 아이가 합류했다. 여든의 어머니와 세 아이들을 서울에 남겨 둔 아픔과 불안 때문에 우리 내외는 늘 갈등을 겪어야 했다. 우리 자문단은 나를 포함해 산업은행 김학균(작고), 과기처 최영환(후에 과기처 차관), 통계국 김일현, 국민대 교수 정세욱 등 모두 5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곳에 와서 보니 섭씨 40도 내외의 고온이어서 낮에는 밖에서 활동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매우 건조하기 때문에 그늘에만 있으면 서늘하고 쓰레기는 썩지 않고 말라버렸다. 이러한 고온의 기후 때문에 오전 근무한 다음 4시간 동안은 각자 집에 가서 낮잠을 자고 와서 오후 근무를 했다. 이 나라 사람들은 매우 순박하고 친절하나 외부인에 대해 폐쇄적이며 약속 이행에 대해 신뢰가 없는 경향이 있었다.

이 나라의 수도 리야드는 하나의 큰 오아시스이다. 여기를 벗어나면 끝없는 사막이다. 사막은 대개 풀과 작은 나무가 간간이 있는 자갈밭이지만 풀 한 포기 없는 순수한 자주색 모래산인 경우도 많아 작렬하는 태양 아래 사막은 황량하기 이를 데 없었다. 비가 적게 오기 때문에 시내 도로에는 하수시설이 없는데 그래도 어쩌다 비가 제법 오는 날에는 도로에 물이 넘쳐 길이 막히는 일이 있고 마른 계곡에도 물이 흐른다.

술은 법으로 금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포도를 사다가 설탕과 함께 버무려 놓으면 날이 건조하여 변질되지 않고 좋은 포도주가 되어 손님이 오면 이것으로 대접했다. 술집도 극장도 다른 유흥시설도 없어서 삶은 기후만큼이나 건조했다.

사막에는 원두막 같은 것을 지어놓고 아랍 커피와 녹차를 파는데 이곳을 찾는 것이 이 사람들의 휴식이었다. 내가 살던 곳에 있는 시장에 가면 수박 메론 등 여러 가지 과일이 많았는데 1960년대 초까지 이곳에서 아프리카에서 데려온 노예의 거래가 있었다고 한다.

그 무렵 이 나라의 파이잘 왕이 조카의 권총에 맞아 서거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 범인에 대한 사형집행을 목격한 일이 있다. 리야드 시청 앞 광장에서 집행되었는데 시민들에게 미리 알려 시민들이 광장을 가득 메운 가운데 범인을 데리고 나와 앉혀놓고 집행관이 큰 칼로 목을 쳐 자르는 것이었다. 잔인한 현장 모습이 며칠 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우리는 이 나라의 경제기획성에서 근무했는데 히샴 나젤 기획성 장관은 우리에게 경제개발계획의 수립, 탈석유 산업정책, 인플레 대책, 부동산 투기억제대책 등에 대해 조언해 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우리는 그러한 문제들에 대해 보고서도 내고 그들을 만나 설명하기도 했다.

이 때는 한국의 중동 진출 초기여서 리야드에는 한일개발 한국건업 삼환기업 등이 사무소를 내고 직원 두세 명이 시장조사를 하고 있었으며 유엔 개발기구 직원으로서 소문섭씨가 와 있었다.

이 나라는 모든 외국 대사관이 수도인 리야드에 있지 않고 홍해 연안의 제다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마치 한국대사관 지부와 같은 임무를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 대사는 초기에는 윤경도씨였고 그 후에는 유양수씨였는데 그 분들이 올 때마다 필요한 도움을 드렸다.

이 무렵 석유달러 도입을 위해 한은의 김성환 총재와 이 나라 중앙은행 총재간의 회의를 주선한 일이 있다. 그리고 경제기획원을 비롯한 정부 각 부처와 경제단체 등이 올 때에도 우리는 ?나라 정부와의 만남을 주선하고 현장을 안내하는 일을 했던 것이다.

1976년 2월19일 나는 약 1년간의 사우디아라비아 생활을 마무리하고 한국은행 조사부로 돌아왔다. 나의 후임에는 구본호 당시 KDI 부원장이 가게 되었다. 나는 한은 조사부에서 같이 근무할 때부터 가까이 지내고 있던 당시 경제기획원 기획국장 김재익과 같이 남덕우 경제부총리 댁을 방문하여 인사를 드리고 중동의 경제현황과 우리 기업의 영업환경에 대해 보고하였다.

이 때 한국에서는 중동건설 진출이 한창 붐을 이루기 시작하는 때여서 중동 진출문제에 대해 정부 및 경제단체와도 적극 협조하였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