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중앙연구원(이하 '한중연')이 16일 고 이선근(1905~1983) 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중연의 전신) 초대 원장이 한국전쟁 기간 평양에서 수집한 사진 자료를 공개했다. 해방공간의 북한 현대사를 증언하는 사진들로 주목된다.
이 사진들은 육군본부 정훈감으로 참전했던 이 전 원장이 유엔군이 평양에 진주한 1950년 10월 입수한 것으로, 앨범 형태로 된 3권 분량이다. 한중연은 "사진의 상당수는 당시 미군도 입수해 이미 알려져 있는 것이지만, 이번에 처음 세상에 공개되는 것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사진 자료에는 김일성의 젊은 시절 사진, 벽초 홍명희(1888~1968)가 연설하는 모습 등이 포함돼 있다. 남북협상(1948년 4월 19~30일) 당시 김규식의 모습도 눈에 띄는데, 숙소에서 누워만 지내는 등 협상에 소극적이었다고 알려진 것과 달리 스스로 남공동선언에 서명하는 장면이 사진으로 찍혀 있다.
앨범 가운데 하나에는 '8ㆍ15해방 4주년 기념 사진첩'이라는 제목과 함께 '문화선전성'으로 북한의 발행기관이 표기돼 있다. 이 앨범에는 사진 설명문이 함께 수록돼 있는데, 지금 북한에서 '령도자'라 쓰는 것을 '영도자'로 표기하는 등 두음법칙이 분화되기 이전의 음운학적 흔적도 보인다.
이 전 원장은 1978년 정신문화연구원장으로 취임하면서 이 사진들을 포함한 각종 고서와 서화 등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자료를 모두 연구원에 기탁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중연은 이 전 원장의 호 '하성'을 딴 하성문고를 원내에 설치, 자료를 보관 중이다. 김정배 한중연 원장은 "이들 사진 가운데 일부는 과거 비밀인가를 받은 사람만 볼 수 있었던 것인데, 이제 세상이 많이 바뀐 만큼 일반에 공개해도 무방하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고 뒤늦게 공개한 배경을 설명했다.
이는 김일성이 태극기가 걸린 연단에서 연설하는 모습, 김구 김규식 등 남한의 정치 지도자들이 북한 지도자들과 어울려 협상하는 모습 등이 분단체제에서는 받아들여지기 힘든 것이었다는 인식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같은 내용의 사진이 이미 미국을 통해 공개돼 한국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된 지 오래라 한중연의 이런 설명은 "공개가 너무 늦었다"는 지적에 대한 해명으로는 군색해 보인다.
한국정치학회장을 지낸 김학준 동아일보 회장은 "유엔군의 평양 진주 당시 미군이 가져간 자료는 국립도서관을 다 채우고도 남을 정도라는 말이 있으며, 이 시기의 북한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노획된 북한 문서'라는 말을 일종의 학술용어처럼 써 왔다"며 "이제 미국에 의존하지 않고도 해방공간의 북한을 연구할 수 있는 자료를 갖게 됐다"고 이날 사진 자료 공개 의미에 대해 말했다.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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