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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9> 사육신 '단종복위 운동'은 권력투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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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9> 사육신 '단종복위 운동'은 권력투쟁인가?

입력
2009.11.17 0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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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관점이 중요하다. 보기 나름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을 권력투쟁으로 풀이해 보고자 한다.

정도전은 건국 초기에 재상 중심체제를 선호했다. 그래서 모든 권력은 재상들의 협의체인 도평의사사에게 몰아주고, 그 정점에 총재(冢宰)를 두고자 했다. 그리고 국왕은 총재 한 사람을 잘 고르면 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이 실각하는 바람에 이 꿈은 사라지고 말았다.

대신 태종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왕권을 확립하고자 했다. 6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실시해 국왕의 직할정치를 펴는가 하면, 여기에 저항하는 공신들을 숙청했다. 사병도 혁파하고, 외척도 무자비하게 도려냈다.

그리고는 이러한 틀을 지속시키기 위해 수성군주로서 적당한 세종을 옹립했다. 태종은 세종에게 자기가 쓰던 신하는 버려도 좋으니 새로운 인재를 뽑아 쓰라고 했다.

그러나 세종은 집현전을 만들어 윗자리는 아버지의 신하, 아랫자리는 자기가 뽑은 신하로 채웠다. 마침 고려왕조의 녹을 먹었던 불사이군 세대가 늙고, 그 아들과 손자는 불사이군이 아니니 벼슬해도 좋다고 해 많은 인재가 몰려들었다.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최항 이개 하위지 등이 그들이다.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을 일생 다른 관직으로 가지 못하게 했다. 이들은 국가의 제도를 만드는데 전념하라고 했다. 일종의 싱크탱크 역할을 한 셈이다. 신석견(辛石堅) 같은 사람은 27년간이나 근무했다.

그러나 이들도 인사부서나 대간 같은 권력기관으로 가고 싶었다. 이를테면 정치를 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세자가 첨사원(詹事院)을 설치해 대리청정을 하자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이 늘었다. 집현전 학사들이 정치세력화 한 것이다. 그러나 정계는 김종서와 황보인 등 대신들이 틀어쥐고 있었다. 이른바 황표(黃標)정사라 해 인사 부정이 자행되었다.

집현전 학사들은 대간으로서 이들을 공격했다. 코너에 밀린 김종서 등 재상들은 안평대군과 연계했다. 이에 반해 집현전 학사들은 수양대군과 맥을 통했다. 그리하여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란에 집현전 학사들은 지지하거나 중립을 지켰다. 세조는 그들을 친압하게 생각해 포섭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세조는 즉위하면서부터 전제군주가 되었다. 태종부터 세종으로 이어져 오는 중앙집권적 왕권강화를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집현전 학사의 일부는 정란공신이 되기까지는 했으나 세조의 전제군주화는 그들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이에 단종 복위라는 명분 하에 일부 급진적 집현전 학사들이 쿠테타를 일으키려 한 것이다. 하위지 이계전 등이 세조의 6조직계제를 정면으로 반대한 것도 그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사육신사건은 겉으로는 충ㆍ역시비로 포장되어 있지만 실상은 권력투쟁의 한 방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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