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플룬가 뭔가 하는 거 때매 손님은 없어도 연말은 연말인가 보네, 니놈들이 연락하는 거 보니…. 미신이다 뭐다 하며 또 헐뜯기나 하겠지 뭐. 오든지 말든지 맘대로 해라."
경기 부천시 소사구에 신당(神堂)을 열고 30년 넘게 무당으로 살고 있다는 '천하대신'(69) 할머니는 전화기에다 대뜸 욕부터 쏟아냈다. 영매 전래의 화법이 그런 것인지, 초인간이라는 존재론적 우월의식 때문인지, 단순히 영적 역량을 과시하기 위한 쇼맨십인지는 몰라도, 그가 구사하는 인칭대명사는 대부분 '연놈'이거나 '새끼' 또는 '자식'이었고, 청산유수 마디마디 욕설과 '무식한 놈' 따위의 타박이었다. 그래도 인터뷰 내내 히죽대며 견딜 만했던 것은 무기(巫氣) 띤 눈초리에 처음부터 기가 눌린 탓도 있겠고, 시커먼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을지 모른다는 짐작에 주눅이 든 탓도 있겠지만, 뭣보다 그의 사설조 이야기의 재미에 금세 매료됐기 때문이었다. 말맛은 덜하겠지만 부득이 용어나 표현은 순화해서 옮긴다.
_ 언제부터?
"남편 내쫓고 이듬해부터 신기(神氣)가 들었으니 햇수로 치면 한 삼십 년 되나?"
_ 신기라면 신병·무병이라고 하는 그건가?
"심한 경우는 살인도 하고, 어떤 이는 아프다고 드러눕고, 또 누구는 산으로 들로 밤마실을 다닌다더만 난 꿈만 좀 산란했어. 자다가 소리소리 지르고 손뼉을 치면서 일어나기도 하고…. 수월하게 (신을) 받은 셈이지. 집안 대대로 무당 내력이 있어서 그랬나봐."
_ 내력이요?
"엄마도 언니도, 고모도 무당이었거든."
_ 남편은 왜?
"재미난 얘기 하나 해줄까?"
_ 예.( )
"됐네, 이 사람아!"
_ ….
경남 충무(현 통영)의 떵떵거리는 선줏집으로 시집을 가 활어장사를 크게 하며 한동안 잘 살았는데 풍랑에 배가 엎어지는 바람에 가세가 기울고 남편이 방황하더니 바람까지 피우더라는 이야기, 아들 하나 낳자마자 남편이라는 작자를 내쫓았더니 그 길로 집 나가 안 돌아오는 바람에 '이날 입때껏 요모냥 요꼴'로 살아왔다는 이야기, 대신(大神)할머니가 들어오려고 그 분란을 일으킨 것인지 이듬해부터 머리가 세고 신병이 들더라는 이야기, 팔자가 사납다 보니 입도 걸어지고 성질도 괴팍해졌다는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더니…, 30년 저편의 이야기 한 토막을 삼키며 혼잣말하듯 이런다. "그런다고 안 오냐, 그 미친 놈이…."
천하대신 할머니를 알게 된 건 순전히 네티즌을 통해서였다. 신병 징후를 경험한 몇몇 사람이 도움을 요청하는 글을 네이버 지식검색 사이트에 올렸는데 그 답변들 가운데 여럿이 '부천 어디어디 가면 어떤 이가 있으니 가봐라, 무턱대고 내림굿 안 해주고 여럿 돌려보냈다더라'는 내용이었다. 신부가 되려면 서품을 받아야 하고 목사가 되려면 안수를 받아야 하듯, 무당이 되려면 선배 무당에게 신굿(내림굿)을 받아야 하는데 그 비용만도 대개 수천만원에 이른다. 천하대신 할머니는 그 수입 마다하고 상당수를 되돌려 보내더라는, 요컨대 믿을 만한 무당이라는 게 요지였다.
"왜 그러는지 나도 몰라. 신이 알려주지. 저 X은 불려먹을 X, 저 X은 못 불려먹을 X, 또 저 X은 불려먹긴 해도 사기나 쳐먹을 X…." '불려먹는다'는 게 무슨 의미냐고 묻자 "저런 맹맹이가 뭔 기자를 한다고…" 하며 혀만 찬다. "그래도 다들 신병이 나서 고통스러워서 찾아왔을 이들 아니냐"고 따지듯 묻자, 되돌아온 대답은 "허수(기가 쇠해 생기는 헛병) 든 X이 한둘인 줄 알아?"였다. 고개만 끄덕이고 앉아있는 기자를 향해 그는 "정말 굿 해줘야 할 X을 내치면 내가 죽어. 그래도 어지간하면 이 짓 안 하고 시집가서 애 낳고 평버~엄한 부인으로 예쁘게 사는 게 좋지"라 했다.
무당(그리고 무교)이 천시되고 배척당해온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허황된 귀신이나 좇는 못 배운 이들의 습속, 그 습속을 부추기는 삿된 이들의 사기놀음 정도로 그 판 자체를 부정하기 일쑤다. 조선에 주자학이 들어오고 유학이 정치·사상 엘리트의 지배이념으로 자리잡으면서 배척의 기세는 등등해졌고, 해방 이후 기독교를 모태로 한 서구 문화가 유입되면서 형세는 더 험악해졌다. 박정희 정권은 근대화의 이름으로 서낭당이며 장승을 도륙하고 전국의 굿당을 눈에 띄지 않는 산 속 깊이 내몰기도 했다.
이화여대 최준식 교수는 최근 낸 <무교_권력에 밀린 한국인의 근본신앙> 이라는 책에서 무교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무교가 한국 기층문화의 핵이라는 근거들을 조목조목 들춘 바 있다. "무교를 이렇게 (저속한 미신으로) 보는 것은 우리의 눈으로 우리 전통을 본 게 아니라 타자의 시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 타자란 유교가 될 수도 있고 그리스도교가 될 수도 있으며 근대화된 서양이 될 수도 있다." 그의 말처럼 무당에 대한 타자화된 시선은 무당 자신들에게도 내재화해 어떤 무당은 '무속인'이라 불러달라고도 한다지만, 최 교수는 "무속이라는 말이야말로 조선 사대부와 같은 기득권 세력들이 무교를 폄하하여 저속하다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이라고 지적한다. 무교_권력에>
조선의 사학자 이능화(1869~1943)는 우리 역사에서 무속의 의미와 형태, 가치를 방대한 조사를 통해 집대성한 <조선무속고> 라는 역저의 처음을 단군신화로 연다. "(조선 민족은) 천왕 환웅과 단군 왕검을 하늘에서 내려온 신, 혹은 신과 같은 인간이라 했다. 옛날에는 무당이 하늘에 제사하고 신을 섬겼으므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그러므로 신라에서는 무당이라는 말을 왕자의 호칭으로 삼았고('차차웅'은 고유어로 무당을 뜻한다), 고구려에는 사무(師巫)라는 명칭이 있었다…" 조선무속고>
<한국문화의 뿌리를 찾아> 라는 책을 쓴 미국 태생의 여성 종교미술사학자 존 카터 코벨은 신라 황남대총 금관의 가지며 곡옥, 금환 등에서 아득히 먼 옛날의 토템 신앙과 무교적 상징을 읽어내기도 했다. "이 금관은 경이로운 음악적 소리를 내는 관이자 악을 물리치는 힘의 상징인, 복합적 차원의 보물로 과시되었을 것이다. 그때의 원초적 힘은 복잡 미묘한 구성과 정교한 세공에 깃들인 채 오늘날 밀폐된 진열장 유리 뒤에 누워 있지만 그 옛날 이 금관이 음악적 기능을 지녀야 했던 것은 무속에서 음악이 매우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한국문화의>
옛 문헌을 들추지 않더라도 무(巫)와 전통의 고리를 확인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최준식 교수는 10개 이상의 별신굿과 마을굿이 무형문화재로 등재돼 있고, 유네스코 무형유산으로 등록된 한국의 문화 가운데서도 무교에 뿌리를 둔 것이 여럿이라 밝힌다. "강릉 단오제는 물론이고, 판소리도 남도 굿판인 시나위판에서 유래한 것으로 악사나 무당이 노래하던 것이 다른 요소와 섞이면서 발전한 것이다."
천하대신 할머니는 점 보러 오는 이들의 천태만상과 무당으로서 보람을 느꼈던 일화, 굿 이야기, 점 이야기, 대신 할머니가 엉터리로 가르쳐주는 바람에 난처한 지경에 빠진 일, 이따금 자신이 모시는 신과 육두문자로 다투기도 한다는 이야기 등을 무용담처럼 들려줬다. "어떤 X들은 일주일에 두세 번씩도 점 보러 다닌대. 잡지에 실렸다더라, TV에 나왔다더라, 누가 용하다더라 하면서…. 복채만 해도 그게 얼마야. 미친 X들이지. 그런 것들 찾아오면 미워. 지들이 지 발로 찾아다니면서 헐뜯고 지랄들을 하거든. 우리 말 믿거나 말거나야. 나쁜 소리 하면 좀 조심하고, 좋은 소리 하면 정성 쓰면서 힘 내서 더 열심히 살고, 그럼 되는 거지. 너무 미치지도 말고, 너무 헐뜯지도 말란 말이야." 무당들에 대해서도 한 마디 꼬집었다. "내림굿 받을 지경에 이른 애들은 대개 집안 망할 대로 망하고 지칠 대로 지친 애들이거든. 수천만원이 말이 돼? 빚 내서 굿하고 카드 긁고 외상하고…, 그건 무당이 아니라 도둑X이지."
한국 무교가 어엿한 종교로서, 그리고 전통 문화의 한 축으로서 인정받지 못한 데는 다양한 이유_체계적 교단을 형성하지 못했고, 여성 중심이었고, 정통의 교리나 율법이 뚜렷하지 않다는 점 등_가 있을 것이다. 여타의 거대 종교와 달리 이성과 합리의 근대정신에 맞설 만한 조직적 역량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천하대신 할머니는 사진 촬영은 고사하고 본명조차 밝히길 꺼렸다. "사돈도 봐야 하는데 얼굴 팔리면 안 된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면서도 "신문에 선전돼서 돈 많이 벌게 되면 절반은 너 떼어주마"라 말하기도 했다. 한사코 숨고 싶은 충동과 한껏 드러내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그는 머뭇거렸고, 그 머뭇거림은 문화민족주의의 비호아래 전통_종교 제의가 아니라_의 이름표를 달고서야 대중 앞에서 굿판이나마 벌일 수 있는 한국 무교의 스스러움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주강현씨가 <굿의 사회사> 라는 책 머리말에 쓴 것처럼, 우리는 어쩌면 남에게 안방을 내주고 스스로는 초라한 객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마당은 삐뚤어졌어도 장구는 바로 쳐라"는 속담도 있다. 속담 그대로 장구를 바로 치자는 말이지, 열심히 치자는 말은 아니다. 굿의>
최윤필 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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