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12월 대법원에서의 형 확정으로 심재권과 나는 석방되었는데, 할 일이 막막했다. 박정희 정권은 이미 그 해 10월 '10월 유신, 100억불 수출, 1,000달러 소득'의 기치를 내걸고 박정희의 종신집권을 제도화한 유신독재체재를 구축하면서 민주화 운동을 철저히 봉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은 이러한 종신집권체제를 구축하는 데 민족통일을 이용했다. 그 해 7월 4일 '7ㆍ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는데, 국내외를 깜짝 놀라게 하는 일대사건이었다.
남한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의 김영주 조직지도부장 명의로 발표된 이 성명은 남과 북은 조국의 통일을 하루 빨리 이루기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하면서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민족통일의 3대원칙까지 밝혔으니, 온 민족이 통일열기에 휩싸일 만도 했다.
7ㆍ4 남북공동성명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것은 잘못일 것이다. 남북의 정권 담당자들이 민족의 통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종신집권체제 구축을 위한 명분으로 삼기 위해 발표한 것임이 명백히 밝혀졌는데도 이것을 높이 평가해서야 되겠는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보수와 진보 구분 없이 7ㆍ4 남북공동성명의 발표를 민족적 쾌거로 받아들이고 '민족통일 3원칙' 운운하는 것은 이것이 북한 김일성 주석의 작품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지식인 사회의 북한 콤플렉스가 얼마나 심한지를 보여주는 한 예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박정희 정권이 1인 종신 집권체제를 구축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항하는 세력이 전혀 없었다. 이미 민주화 세력이 초토화되다시피 한 데다 사실상의 계엄령인 위수령을 선포해 놓고서 이런 조치를 취하니 이에 반기를 들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만큼 민주세력의 역량이 미흡함을 의미했다.
나는 일단 서울에 있을 곳을 마련해야 했다. 마침 대성학원에 다니는 대학입시 재수생을 가르치게 됐는데, 학과공부는 학원에서 지도 받기 때문에 나는 학생이 탈선하는 일만 없도록 생활만 잘하면 되었다.
나는 이 때 심재권을 자주 만났는데, 심재권이 거의 매일 나의 하숙집으로 오다시피 했다. 우리는 복학을 명분으로 학장실이나 총장실을 들락거렸으나 학교에 자주 갈 수도 없었다. 학교 근방에만 가도 정보원이 따라붙어 후배들을 만나기는 더욱 더 어려웠다. 그래서 사회법학회 후배들을 밖으로 불러내어 만나곤 했으나 학생운동을 다시 활성화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나는 전태일(1948~70) 사건 당시에 전태일의 수기와 일기 등을 보면서 언젠가 전태일의 전기를 하나 써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이 때가 그것을 쓸 수 있는 시기 같았다. 그래서 우선 전태일이 남긴 수기와 일기를 복사하는 일이 급했다. 이소선 어머니(전태일의 어머니)로부터 전태일의 수기와 일기 모두를 넘겨 받았으나 복사가 쉽지 않았다.
그 때는 복사기가 대단히 귀한 데다 이런 '불온문서'를 복사해준 것이 발각될 때는 이 사실만으로도 처벌될 수 있었다. 그런데 처벌이 문제가 아니라 자칫하다가는 이 자료 전체를 정보기관에 뺏길 수 있으니 여간 조심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누구의 소개로 만났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데, 감리교 신학대학의 포이트라스(한국명 박대인) 교수를 만나 그분을 통해 복사할 수 있었다. 서울 신문로 새문안교회 지하강당에서 복사물을 넘겨받았는데, 밤에 사무실에 혼자 남아 있다가 복사했다면서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니 안심하라고 말해주었다. 너무나 고마웠다.
하여튼 나는 이 복사물을 전달 받으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침내 이것을 복사하게 되었구나' 싶어서. 원본은 이소선 어머니에게 돌려주고 복사본은 내가 가졌다. 그리고 이소선 어머니를 만나서 전태일 일가가 살아온 내력과 특히 전태일의 어릴 적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매일 정리했다.
주로 오전에 이소선 어머니를 만나 이야기를 듣고 오후에는 이것을 정리했다. 이소선 어머니는 한 번 말을 시작했다 하면 끝이 없었다. 서너 시간 이상 들은 것을 그대로 옮겨 적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마 두 달 넘게 이렇게 한 것 같은데 노트 3권 분량이 넘었다.
물론 이소선 어머니를 만나면 청계노조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많은 조언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해 8월 9일 나는 속리산에서 있은 부산공전 불교학생회에서 주관한 수련회에 참여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대전역에서 '김대중 납치사건'을 보도한 호외 신문을 보게 되었다.
경천동지할 사건이었다. 괴한들의 정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면서 이러 저런 정황들만 보도하고 있었는데, 박정희 정권이 감행한 일이 틀림없었고 중앙정보부가 이 사건을 직접 지휘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나는 본래 부산에 둘렀다가 서울로 돌아올 생각을 했으나 곧바로 서울로 돌아왔다. 우선 심재권을 만났다. 이 납치사건을 규탄하는 학생들의 투쟁을 조직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심재권은 후사연 후배들을 주로 만나고, 나는 사회법학회 후배들을 주로 만났다. 그런데 학생들의 투쟁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서울문리대의 선배 세대가 학생들이 떨쳐 나서는 것을 반대했는데, 이들은 당시의 상황에서 무리하게 투쟁에 떨쳐 나섰다가는 그나마 남은 역량마저 다 소진시킨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9월 한 달을 다방면으로 설득했는데도 동의하지 않아 결국 심재권과 나는 가능한 범위에서 학생들을 모아 투쟁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10월 2일, 서울문리대 교정에서 문리대, 법대, 상대생들이 모여 데모를 벌였는데, 50명이라도 모일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500명 이상의 학생이 모였다. 대단한 성공이었다. 이른바 '10ㆍ2시위'인데, 이 사건으로 유신독재체제는 출범과 동시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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