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약장수이자 목사님'에 비유하는 보험맨들이 있다.
이들은 보험 상품을 내다파는 설계사도, 상품을 만드는 계리사도, 자산을 굴리는 운용사도, 그렇다고 이들을 관리하는 관리조직도 아니다. 굳이 빗대자면 '도매상'에 가깝단다.
본사에서 만든 상품을 일선 소매상(보험설계사)에게 떼다 넘기는. 보험사에 꼭 이런 역할이 필요할까 싶지만, 자신들 덕에 회사 영업실적도 확 달라졌다고 한다. '세치 혀'로 고객을 구슬리는 설계사들을, 역시 '세치 혀'로 구슬리며 살아가는 '선수 위의 선수'들을 만나보자.
국내 1위 보험사 삼성생명에는 '홀세일러'라고 불리는 조직이 있다. 2004년 선진 보험사들의 제도를 벤치마킹해 국내 처음으로 도입됐다.
이들의 역할은 본사가 만든 보험상품을 일선 FC(재무설계사)와 영업지점장들에게 충실히 전달하는 것. 'A 보험에 몇 년간 얼마를 부으면 얼마를 준다' 식의 설명이 아니다. 'A 상품이 왜 개발됐으며, 누구에게 팔만 하고 그들을 어떻게 설득시킬 지'를 가르치는 게 이들의 임무다.
선발 기준은 검증된 영업력과 '말발'. 평소 일반 고객을 물론, 지점에 소속된 설계사들을 잘 구워삶아 왔던 직원들만 발탁된다. 12명의 홀세일러들은 전국 각지에 퍼져 있는 4만여명의 FC와 지점장들을 1년 12달 만나러 다닌다.
1인당 평균 한 달에 만나는 사람만 3,500명. "세상에서 가장 두렵고도 지겨운 일이 사람 만나는 일"이라는 말도 괜한 너스레만은 아니다.
이들의 본업은 '강의'다. 설계사 하면 다 비슷할 것 같지만 하루에도 아침, 점심, 저녁 매번 전혀 다른 집단을 상대해야 하니 '약장수'가 따로 없단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오늘 오전엔 40~50대 베테랑 아줌마 설계사 분들을 만났습니다. 영업으로 잔뼈가 굵으신 만큼, 고액 연금과 세무가 주제였죠. 점심 때 만난 20대 대졸 남성 설계사들에겐 일단 기본 상품설명이 우선입니다. '종신상품이 이런거다' 정도면 충분하죠. 저녁엔 기업체를 상대로 한 단체보험 채널을 만나야 합니다. 주로 20~30년 직장 경력을 가진 50대 남성 분들이죠. 각자 분야에서는 전문가들이시니 어줍잖은 설명을 들이대면 대번에 탄로가 납니다. 강사도 매 시간 카멜레온처럼 변해야 하는 거죠."(전석헌 과장)
강의 효과를 높이려면 보이지 않는 노력도 필요하다. 가령, 아줌마들을 만날 땐, 농담도 가정사에 대한 걸로 한다. 향수도 뿌리고, 구두도 한번 더 닦고, 빨간 넥타이를 맨다. 반대로 아저씨들을 만날 땐? 치장은 오히려 금물이다. 최대한 몸을 숙이고 존대를 붙여줘야 수업 효과가 올라간단다. 쉬는 시간에 틀어놓은 심심풀이 동영상도 다르다. 젊은 사원들에겐 '소녀시대 뮤직비디오', 아줌마 설계사들에겐 '생활의 달인'이 최고다.
이들의 생활주기는 프로야구 선수들과 닮았다. 지방 각지를 순회하다 보면, 1주일 내 외박은 기본이다. 기껏해야 한 달에 보통 5,6일 정도를 집에서 잔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 애들을 보면, 쑥쑥 자란다는 게 피부로 느껴진다"는 이들이 많다. 외박이 익숙해져서일까. 오죽하면 한 달에 한번 팀 전체가 모여 다음달 강의재료를 준비할 때도, 이들은 1주일간 합숙을 한다.
낯선 지방의 소도시들을 전전하다 보니 '값 싸고 품질 좋은' 모텔과 식당에는 도가 텄다. "전국의 싸고 좋은 모텔만 모아 지도를 그려 볼까 합니다"(박재형 과장) "하나 둘 가져다 놓은 모텔 칫솔 세트가 집에 수백 갭니다. 아침에 서류가방 하나 달랑 들고 모텔을 나설 때면 따가운 시선이 꽂힐 때도 한 두번이 아니죠"(전상욱 과장) "전에는 차에서 모텔 명함 하나만 나와도 집사람이 난리가 났죠. 지금은 '아가씨' 사진이 박힌 모텔 명함 6,7장은 기본입니다."(전석헌 과장)
이들은 인기를 먹고 산다. "일종의 사내 연예인이랄까요. 강사에 대한 기대치는 계속 높아지는데, 한번만 소홀히 하면 바로 본사에 피드백이 들어옵니다. 강의 때마다 스트레스가 엄청나죠."(전석헌 과장) 대신 강의를 들은 설계사들의 영업실적이 올라가면 그만한 보람도 없다. "강의에 늦지 않으려고 9개월동안 '과속 딱지'만 57만원 어치를 끊었습니다. 이런 비용은 한 푼도 지원이 없지만 감수해야죠."(남기정 과장)
설계사들조차 답답해 하는 영업 노하우 제시도 이들의 몫이다. "요즘 유행하는 '골드미스'들은 미혼에 가족도 없으니 노후 보험이 필요없다고 버틴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책임질 가족이 없다는 얘기는 동시에 나중에 나이 들면 돌봐줄 가족 역시 없다는 얘기'라고 했죠. 또 나이든 노부모는 나중에 어떻게 모실거냐고."(이봉수 대리)
"더 이상 팔 대상이 안 보인다고 하길래, 신부님이나 스님을 공략해 보라고 했습니다. 가족이 없으니 종탄맨壅?필요없겠구나 하겠지만 이 분들 역시 고아원, 양로원 같이 평소 돌보던 단체 분들이 홀로 남겨진다고 설득해 보라구요."(정원철 과장)
이들은 필요한 지식만 꼭 찍어 전달하는 '입시학원식 강의' 대신, 성직자들처럼 '가치를 전달하는 강의'를 지향한다. "보험이 왜 필요한지, 그 가치를 설명하는 데 주력합니다. 먼저 설계사들을 감동시켜야, 나아가 고객들도 감동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재테크는 돈을 불리는 기술이지만, 우리가 전파하는 재무설계는 인생의 희로애락과 생로병사가 담긴 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2004년부터 이들이 활동을 시작한 이후, 삼성생명의 종신보험은 평균 10만원대 미만에서 20만원대로 크게 올라갔다. "고객들이 보험의 필요성과 인생의 리스크를 스스로 인식한 결과"라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김용식 기자 jawoh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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