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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언어학 카페 말들의 모험] <8> 연재를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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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언어학 카페 말들의 모험] <8> 연재를 마치며

입력
2009.11.15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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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시작할 때 내심 일백 회는 넘길 요량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로써 ‘말들의 모험’을 닫습니다. 일간 신문 지면에 어울리지 않는 글이라는 의견이 압도적이기 때문입니다. 제 불찰입니다. 언어를 생각거리로 삼은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었을 겁니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무디고 완고해, 독자들의 마음을 어지럽힌 듯합니다.

언어학 개론서들은 대개 음성학, 음운론, 형태론, 통사론, 의미론 따위를 줄기로 삼고, 언어변화(통시언어학), 심리언어학, 사회언어학 따위를 그 뒤에 배치합니다. 저는 또 하나의 ‘언어학 개론’을 쓰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체제의 책들은 한국어로나 외국어로나 너무 많이 나와 있으니까요. 저는 한국어를 비롯한 자연언어들의 예를 널리 가져오면서도, 언어학자들과 언어학 고전들을 이야기의 중심에 놓고 싶었습니다. 소쉬르와 촘스키의 책들을 앞에 가져온 것도 그래서입니다.

또 첫 회에 로만 야콥슨을 인용하며 ‘오지랖 넓은 언어학’ 얘기를 하겠다고 밝혔듯, 정통 언어학자로 분류되는 이들만이 아니라, 인접 학문세계의 일원으로서 언어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이들과 그 저서들도 살피고 싶었습니다. 현대언어학의 첫 삽을 뜬 이는 소쉬르이지만, 언어에 대한 관심은 인류 지성사와 그 시작을 함께 했습니다. 실뱅 오루(Sylvain Auroux)라는 이가 세 권으로 엮은 <언어사상의 역사> (Histoire des idees linguistiques)라는 책을 보면, 자연언어에 대한 탐구가 이미 서력 기원 이전부터 이뤄졌음을 알게 됩니다. 특히 고대 인도에서는 오늘날의 정통언어학에 비견할 만한 연구들이 적잖이 이뤄졌습니다. 중세 아랍과 중국, 유럽, 근대 일본에도 꽤 볼 만한 언어학적 탐색이 있었습니다. 훈민정음 창제에 간여한 15세기 한국인들은 당대까지 인류가 축적한 음운론 지식의 최전선에 서 있었다고 할 만합니다.

소쉬르 이전의 언어학사는 흔히 비교문법이라 불렀던 역사비교언어학만이 아니라(고대 인도인들이 쓰던 산스크리트어가 자기들의 언어와 어쩌면 한 ‘가족’일지도 모른다는 걸 깨달았을 때 18세기 유럽인들은 얼마나 놀랐을까요!), 데카르트나 훔볼트 같은 이들의 철학적 문법 또는 언어철학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의 언어학’, 곧 과학으로서의 언어학 전통이 흐릿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소쉬르 이후라고 해서 언어 탐구가 오로지 언어학자들만의 손에서 이뤄진 것은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소쉬르 이후의(또는 거의 동시대의) 거장들이라 할 만한 언어학자들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미국의 블룸필드(Leonard Bloomfield)와 사피어(Edward Sapirㆍ언어가 세계관을 결정한다는 사피어-워프 가설, 곧 언어 상대성 가설은 그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해리스(Zellig Harrisㆍ‘변형’이라는 개념을 촘스키에 앞서 떠올린 이가 해리스입니다)와 촘스키, 러시아 출신의 트루베츠코이(Nikolai Trubetskoi)와 야콥슨, 덴마크의 옐름슬레우(Louis Hjelmslevㆍ흔히 ‘언리학’이라 번역되는 ‘glossematics’를 확립해 소쉬르 구조언어학을 추상적 극단으로 몰고 갔습니다), 프랑스의 마르티네(Andre Martinet)와 무냉(Georges Mounin), 벤베니스트(Emile Benveniste)와 아제주(Claude Hagege) 같은 이름들은 기다란 ‘언어학의 거장’ 리스트의 극히 일부분일 뿐입니다.

그런데 소쉬르가 언어학을 기호학의 한 분과라고 언명했듯이, 흔히 기호학자로 알려진 이들을 언어학사는 누락할 수 없습니다. 프랑스의 바르트(Roland Barthe)와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 이탈리아의 에코(Umberto Eco), 러시아의 로트만(Yuri Lotman) 같은 이들이 그렇습니다. 더 나아가, 사피어가 인류학자이기도 했고 야콥슨이 시학자(詩學者)이자 커뮤니케이션 이론가이기도 했듯, 언어학사는 언어학의 변두리나 바깥에서 언어를 탐구한 이들을 빠뜨릴 수 없습니다. 흔히 분석철학자나 논리학자로 알려진 이들이 이 범주의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독일의 프레게(Gottlob Frege)와 카르납(Rudolf Carnap), 영국의 러셀(Bertrand Russell)과 라일(Gilbert Ryle), 스트로슨(Peter F. Strawson)과 오스틴(John Austin), 오스트리아 출신의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같은 이름들은 대부분의 의미론 교과서가 무겁게 다룹니다. 의미론은 분명히 언어학의 한 분야이지만, 철학의 한 분과인 논리학이나 분석철학과 많은 부분이 겹칩니다.

검퍼스(John Gumperz)라는 이는 사피어처럼 독일 출신의 미국인이고, 사피어와 마찬가지로 인류학에서 출발해 언어학에 도달했습니다. 사피어의 언어 연구가 아메리카 인디언(원주민) 언어들에서 시작한 데 비해, 검퍼스의 언어 연구는 ‘진짜’ 인디아(인도)의 언어들에서 돛을 올렸지요. 생전에 프랑스만이 아니라 세계 사회과학계의 황제 노릇을 한 부르디외(Pierre Bourdieu)도 빠뜨릴 수 없습니다. 부르디외는 분명히 사회학자였지만, <말한다는 것의 뜻> (Ce que parler veut dire)을 비롯한 그의 몇몇 저작들은 언어(의 계급적 분화)에 대해 깊은 통찰을 보이고 있습니다. 사람은 자연언어(들)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 자연언어(들)로부터 독립적인 추상언어로 생각한다는 주장을 내놓고, 이 ‘사고의 언어’(language of thought)를 ‘멘털리즈’(mentalese)라 부른 바 있는 퀘벡 출신의 인지과학자 핑커(Steven Pinker)도 언어학사가 기록해야 할 이름입니다. 그를 굳이 언어학자라 부르자면 심리언어학자라고 부를 수도 있겠습니다. 이렇게 언어학사라는 하늘에는 별자리를 이루는, 또는 별자리 바깥에서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이 박혀 있습니다.

언어학과 멀리 떨어져 있는 듯 보이는 사상의 거장들이라 해서 늘 언어학의 그물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만 101세를 눈앞에 두고 지난달 30일 타계한 브뤼셀 출신의 프랑스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 같은 이가 그렇습니다. 그가 언어라는 것 자체에 구체적 관심을 보이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지식의 계보에서 소쉬르의 자식으로 인지됩니다. 레비-스트로스라는 별은 구조주의라는 별자리를 이루는 큰 별 가운데 하나입니다.

레비-스트로스가 소쉬르에게서 직접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이었던 레비-스트로스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를 피해 뉴욕으로 망명했고, 거기서 로만 야콥슨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야콥슨에게서 ‘구조’라는 개념을 배웠습니다. 야콥슨의 ‘구조’는 소쉬르의 ‘체계’와 거의 같은 것입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이 ‘구조’라는 개념에 홀딱 매료되었고, 이 개념을 기초로 그때까지와는 전혀 다른 인류학을 구상하게 됩니다.

‘일반언어학강의’에서 우리가 들춰냈던 소쉬르의 문장 하나를 다시 떠올려봅시다. “체스 놀이가 상이한 말(馬)들의 결합 안에서 전적으로 이뤄지듯, 언어도 체계라는 특성이 있으며, 이 체계는 완전히 그 구체적 단위들의 대립에 바탕을 둔다.” 이 말을 인용하면서 저는, ‘상이하다’ ‘대립’ 같은 말에 주의를 기울이자고 제안했습니다. 다름으로써 대립해야 가치가 생산되고, 그 가치들을 낳은 내적 관계들의 그물이 체계, 곧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언어만이 아니라 친족이나 신화 따위도 구조라는 것을 벼락같이 깨달았습니다. 즉 친족에서 중요한 것은 아버지(나 아들이나 외삼촌)라는 실체가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대립을 통한 차이, 또는 차이를 통한 대립), 아버지와 외삼촌 사이의 관계 따위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또 야콥슨에게서 배운 ‘음소’(phoneme)라는 개념에 착안해 ‘신화소’(mytheme)라는 개념을 고안했습니다. 구조주의 음운학자들이 음소를 언어 분석 단위로 쓰듯, 레비-스트로스는 신화소를 신화 분석 단위로 썼습니다. 이렇게, 구조주의 인류학이 탄생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랑그는 형식이지 실체가 아니다”라는 소쉬르의 유명한 선언을 레비-스트로스 식으로 이리 바꿀 수도 있겠습니다. “친족이나 신화는 형식이지 실체가 아니다.” 여기서 ‘형식’은 ‘구조’나 ‘관계’라는 말로 대치할 수 있겠지요. 정신분석학자 라캉(Jacques Lacan)도 인간의 무의식을 언어와 같은 구조로 여겼다는 점에서 소쉬르의 자식이자 언어탐구자였다 할 수 있습니다.

언어학이 언어의 그림자라면, 언어학의 이런 모험은 말들의 그림자들의 모험이겠지요. 그 모험하는 그림자들을 우아하게 그려보려던 제 욕심을 오늘 접습니다. ‘말들의 모험’을 진지하게(그리고 바라건대는 즐겁게!) 읽어주셨을지도 모를 소수의 독자들께 깊은 감사와 송구함을 표합니다.

고종석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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