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오후 11시 경기 안성시 한국표준협회 인재개발원의 한 교실. 둥글게 모여 앉아 수다를 떨던 남녀 학생 20명은 문이 열리자 일순 입을 다물고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2010학년도 건국대 수시모집 '자기추천' 전형에서 문과대에 지원, 이날부터 1박2일간 진행된 합숙면접에 참여한 학생들이다.
이 자리는 오전 11시 오리엔테이션을 시작으로 1차 개별면접, 2차 집단토론까지 빡빡한 첫 날 일정을 소화한 지원자들을 위해 학교측이 일종의 뒷풀이처럼 마련한 '입학사정관과의 대화' 시간이었다. 면접 과정도 힘겨웠지만, 외부 환경과 철저히 단절된 채 꼬박 하루를 보내느라 지원자들은 적잖이 지쳐 있었다.
입소 때부터 옷가지와 세면도구를 빼고는 휴대폰, MP3 플레이어 등 전자기기를 포함한 개인용품을 일절 몸에 지닐 수 없을 뿐 아니라, 화장실에 갈 때도 진행요원들의 안내를 받아야 했다.
"섞어 앉을까?" 면접관으로 참여한 김도식 철학과 교수가 학생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앉으며 "이시간은 평가에 포함되지 않는다. 편하게 이야기하라"고 말을 건넸지만, 긴장된 분위기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이거 2% 부족한데? 두꺼비가 있는 알코올 음료가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김 교수가 책상에 놓인 음료수를 들어 보이며 농을 던지자, 그제서야 지원자들 사이에서 웃음과 말이 터졌다.
한 번 터진 말문은 막힘이 없었다. "다른 학교에서 본 수시 면접은 너무들 짧아 답답했는데, 세세한 얘기까지 들어줘 좋았다"는 의견부터 "합숙이라고 해서 잔뜩 기대했는데 개별 면접은 15분밖에 되지 않아 아쉬웠다"는 지적까지 다양한 의견이 쏟아졌다.
김 교수는 "합숙 취지를 살리려면 면접관들이 모든 생활을 함께 해야 하지만, 인원이나 비용 등 현실적 어려움이 많다"며 양해를 구하기도 했다. 평가자와 피평가자 지위를 떠난 허심탄회한 대화는 자정을 살짝 넘긴 시각까지 이어졌다.
자기추천 전형은 특정 분야에 재능과 소질이 있다고 생각되는 학생들이 말 그대로 '스스로'를 추천하는 것으로 입학사정관 전형의 한 방식이다.
건국대는 지난해 처음 자기추천 전형과 합숙면접을 도입해 15명을 선발했는데, 호응이 좋자 올해는 60명으로 늘렸다. 1차 서류전형을 통과한 180명은 입학사정관 및 면접위원 등 27명과 1박2일 숙식을 함께 하며 3단계 심층 면접을 치렀다.
4개조 9개 팀으로 나눠 진행된 1차 개별면접에서 입학사정관 1명과 전공교수 2명은 수험생 1명을놓고 15분 동안 질문을 쏟아냈다. 이른바 '압박 면접'이다. 면접관들은 학생들이 자기소개서와 자기활동보고서 등에 적은 내용을 세세한 개념의 뜻까지 물었다. 답변이 추상적으로 흐를라치면 꼬집듯 추가 질문이 이어졌다.
철학과를 지원한 김숙현(18ㆍ현대고3)양은 "자기소개서에 형이상학파에 관한 내용을 적었다가 관련 학파의 계보까지 꼼꼼히 물어보는 통에 진땀을 흘렸다"고 말했다.
같은 철학과 지원자인 김근형(18ㆍ 동인천고3)군은 "학교 성적은 뛰어나지 않지만 중학교 때부터 종교철학에 관심이 많아 200여개에 달하는 국내 종교 분파를 꿰고 있다"면서 "부모님과 친구들도 이해해주지 못한 부분을 면접관들이 관심을 갖고 들어주어 너무 기뻤다"고 말했다.
연이어 치러진 토론면접에서는 4~6명의 학생이 면접관 3명이 지켜보는 앞에서 '다문화, 공존, 동화'를 주제로 15분간 주어진 지문을 읽고 30분간 토론을 하며 합의를 이끌어내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양성관 건국대 입학사정관 실장은 "강도 높은 면접을 통해 자기 손으로 쓰지 않은 서류나 거품 봉사활동 등 과장된 내용들은 대부분 걸러진다"면서 "급조한 경력보다 진솔함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15일 오전 실시된 3단계 발표면접은 기업체에서의 사업발표 프리젠테이션을 방불케 했다. 지원한 전공 분야 주제와 관련해 주어진 참고 자료를 토대로 5분간 면접관들에게 화이트보드에 자신의 생각을 적어가며 발표한 후 질문에 답하는 방식으로, 학습능력 평가 보완을 위해 올해 새로 도입했다.
합숙면접을 마친 학생들은 대체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김동현(17ㆍ송탄고3)군은 "국영수 위주의 수능, 내신 성적만으로 평가 받았다면 발명으로 받는 수많은 상과 특허 성과를 인정받을 수 없었을 것"이라며 "입학사정관 전형을 통해 대학에 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말했다.
이영준(18ㆍ충남예산고3)군도 "1박2일 동안 팀으로 나눠서 함께 생활하다 보니 응시자들끼리도 서로서로 실력을 알게 되는 것 같다"며 "공정성에 관한 의문도 어느 정도 풀렸다"고 말했다.
서한손 건국대 입학처장은 "지난해 자기추천 전형에 대해 학생, 교수 모두 만족감이 높았고, 이렇게뽑힌 학생들의 성적도 좋다"면서 "이 전형의 모집 인원을 늘리고 싶지만 당장은 비용 등 어려움이 있는 만큼 우선은 내실을 기하는 데 힘쓰겠다"고 말했다.
박철현 기자 kar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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