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내 고향 경북 상주에 감 따러 가는 날이다. 나 없는 동안 혼자 고생할 남편을 뒤로 하고 강원 강릉역에서 기차에 올랐다. 나한정, 통리, 철암, 봉화, 영주…. 어렸을 적 사회책에 보았던 지명을 따라 상주역에 도착했다. 큰 오빠가 트럭을 몰고 마중 나와 있었다.
아버지를 꼭 닮은 얼굴, 그리고 아버지를 꼭 닮은 걸음걸이를 가진 큰 오빠가 머리가 하얗게 늙어가는 모습을 보니 가슴 한 켠이 아련해졌다. 나는 애써 눈물을 감추며 "오빠!"하고 반갑게 불러 보았다.
트럭에 오르니 큰오빠가 단감 봉지를 내밀며 "감을 따 놓고 나도 시간이 없어 먹어보지 못했다"라며 권했다. 나는 큰 오빠와 단감을 나눠 먹었다. 상주의 감은 유난히 달다.
상주는 우리 집안의 선조 때부터 대대로 이어지는 고향이다. 언제나 가고 싶은 곳, 자주 들르지 못해 그리운 곳이다.
어렸을 적 나는 작은 오빠랑 "나중에 커서 돈 벌면 고향 마을에 집 짓고 같이 살자"고 다짐했다. 결국 나는 약사가 됐고 작은 오빠는 건축가가 됐지만 고향에 집을 지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그 약속은 아직도 실현되지 않고 있다.
장에 가거나, 친척집에 갈 때나, 외지로 나갈 때면 버스를 타러 나왔던 '백두점'이란 곳을 지나쳤다. 어렸을 적에는 크게 보였던 이 곳이 지금은 작고 초라하기 그지없다.
울퉁불퉁한 산길로 접어들어 트럭이 아니면 올라갈 수 없는 가파른 돌길 언덕을 올랐다. 어머니와 큰 올케 언니, 그리고 여동생이 일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 일행은 나를 보더니 손을 멈추고 "왔나, 배고프지?"하며 반갑게 맞이했다. 모두들 '몸빼' 바지에 햇빛 가리개용 모자를 썼다.
집 바로 뒤편 산에 잠들어 계신 아버지께 인사를 드렸다. 점심 식사를 마친 후 나도 같은 옷차림을 했다.
올해도 감 가격이 좋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감을 공판장에 내지 않고 직접 곶감을 만들기로 했단다. 판로가 걱정이긴 하지만 몇 년 전부터 사먹어 본 사람들이 입소문을 내줘 주문이 들어오고 있다. 이런 저런 얘기로 꽂을 피우며 일을 하니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날아갈 것 같았다.
우리 식구는 모두가 몸을 사리지 않고 일을 열심히 했다.
감 농사를 도맡고 있는 큰 오빠를 하나라도 더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제일 체구가 약한 여동생도 열심히 일을 한다. 그런 여동생이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하다.
여동생은 어려서부터 병약했지만 항상 나보다 일을 야무지게 잘했다. 그래서 나와 여동생이 일을 같이하면 칭찬은 항상 여동생 몫이었다.
나는 뒷손질을 잘 못하고 덤벙대는 편이다. 어렸을 적에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하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일을 가장 잘하는 분은 일흔이 넘은 어머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열심히 일을 하시고 일의 양도 엄청나다.
우리 형제자매는 어머니의 일하는 모습을 보고는 허를 내둘렀다.
날이 어두워졌다. 우리는 아버지가 생전에 한 칸 지어 놓으신 넓은 황토 방에 군불을 지폈다. 뜨끈뜨끈해진 방바닥에 몸을 눕혔다. 온 몸이 나른해지며 어느새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몸이 가뿐해졌다. 다시 힘든 하루를 힘차게 시작하게 된다.
오후가 되니 지난 주말에 와서 감 따느라 고생했던 작은 오빠가 엄마와 큰 오빠가 좋아하는 전어회를 사가지고 와서 일에 합류했다. 작은 오빠가 합류하자 모두에게 다시 활기가 넘쳤다.
곶감걸이에 감이 차곡차곡 층층으로 걸렸다. 마치 주황색 '감꽃'이 핀 것 같다.
일손이 부족하지만 모두들 열심히 한 덕분이었다. 약국을 지키고 있을 남편이 미안하고 고맙다. 남편은 이곳 상주에 오면 아궁이에 불 때고, 바짝 마른 콩대로 모깃불을 피워놓고, 콩깍지가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소리를 좋아했다. 남편은 몇 년 전엔 잠도 안자고 콩대를 태우고 또 태우느라 밤을 뜬 눈으로 지내기도 했다.
그런 남편이 고향에 올 것에 대비해 큰 올케 언니가 고모님 댁에서 콩대를 한 트럭 실어다 놓았단다. 밤새도록 마음껏 태워 보라고 말이다.
그 다음날, 막내 남동생이 마지막으로 와서 3남 2녀가 모두 모였다. 웃음꽃이 피었다.
아버지는 생전에 당뇨병과 합병증을 앓았다. 퇴직 후 어머니와 함께 고향 상주의 산비탈에 감나무를 심었다. 고생도 많이 했지만 한때는 건강도 많이 좋아졌었다. 아버지는 각지에 살고 있는 자식들에게 단감과 곶감을 보내는 재미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 돌아가신 것이 불과 수년전이다. 아버지가 땅을 일궈 놓았기에 우리 가족은 흩어져 지내다가 일 년에 한 번씩이라도 이렇게 모이곤 한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큰 재산을 남겨 주었다.
아버지는 자신이 손수 지은 집 뒤의 백일홍 나무 아래 이제 잠들어있다. 아버지는 우리 가족이 어머니와 큰 오빠를 중심으로 단합하는 모습을 흐믓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세상을 열심히 살아야겠다.
올해도 이렇게 3박 4일 동안의 곶감 만들기를 돕는 일은 끝이 났다. 이제 몇 달 후면 맛있는 곶감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마음은 이미 곶감을 아주 좋아하는 남편을 향했다.
강원 강릉시 포남동 - 성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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