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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전의 문화재 다시 보기] <8> 경천사탑의 수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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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전의 문화재 다시 보기] <8> 경천사탑의 수난

입력
2009.11.12 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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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전시본관에 들어서면 대리석탑이 우뚝 서서 관람객을 맞이한다. 경천사(敬天寺) 10층 석탑이다. 경천사는 개성 근처로 고려시대 수도였던 황해도 개풍군 중련리 부소산 기슭에 있었던 고려시대 사찰이었다.

14, 15세기에 당시 조선의 억불숭유정책의 영향을 받아 폐허가 되었던 모양이다.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로 찬탈할 무렵인 1907년 조선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결혼식에 일본특사로 궁내대신 타나카 미쓰야키(田中光顯)가 1월 20일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는 우리 땅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 탑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결혼식 참석은 핑계였다. 타나카는 처음에는 고물상인 고도사고로(近藤佐五郞)를 시켜 반출을 시도했으나 주민들의 반발로 실패하자 2월 4일 일본 헌병들을 동원해 총칼로 위협해 해체했다.

얼마나 다급했던지 해체한 부제들을 가마니에 담아 옮겼다. 14미터가 넘는 높은 탑을 아무런 조사와 준비 없이 마구잡이로 해체 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이 와중에서 부제들이 깨지기도 하고 손상을 많이 입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경천사는 이렇게 급히 해체돼 일본의 동경제실박물관(현 동경국립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그런데 이게 국제 문제로 비화됐다. 당시 영국인 어니스트 T. 베셀이 발행하고 있던 대한매일신보가 이 사실을 처음 보도했다.

그러자 월간지 코리아리뷰의 발행인 미국인 호머 B. 헐버트가 현장을 답사해 다시 한번 사실을 폭로했다. 그는 일본 영자 신문 제펜 크로니컬과 미국 뉴욕포스트에도 불법 약탈사실을 기고하고 국제 사회에 알렸다. 그러나 소 귀에 경 읽기에 지나지 않았다.

1910년 우리나라를 집어 삼킨 일본은 조선총독부를 세워 이 땅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초대 총독으로 부임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자신의 정치적인 목적으로 탑을 원위치로 돌려놓도록 종용했으나 일본 황실의 영향력을 믿고 타나카는 무시했다.

그러다 데라우치가 내각수반인 총리대신이 되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게 되자 드디어 1918년 11월 포장도 풀지 않은 상태의 탑 부제들이 우리나라로 돌아와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방치됐다.

광복 후 1960년에 시멘트 모르타르를 이용해 복원해 당시 국립박물관 앞에 세워 두었다. 국립박물관은 광복 후 경복궁내 마련된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인수해 사용하고 있었다.

세월이 지날수록 대리석탑에 사용된 시멘트 독과 산성비 등 환경오염으로 풍화가 가속화되고 있었다. 결국 국립문화재연구소가 1995년부터 10여년의 기간과 많은 예산을 들여 해체 후 보존처리를 완료하고 2005년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이 건립되면서 현재의 위치에 있게 되었다.

이 탑 수난의 역사를 보면 일제 강점기 시대 일본이 우리나라 문화재에 저지른 만행을 알 수 있다. 한 가지 수수께끼는 분명히 있었을 사리와 장엄구의 행방이다. 남북통일이 되면 이 탑의 운명은 또 어떻게 될 것인지 궁금하다.

경기문화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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