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오후 6시 대구 수성구 동천초등학교 인근의 3층 건물 지하실. "끼이익"거리는 이중 문을 열고 들어서자 천장과 벽면이 온통 계란판 모양의 검은 흡음판으로 둘러싸여 있다. "자, 시작해 볼까." 사인이 떨어지자 4인조 밴드 중 드럼이 먼저 박자를 치고 들어간다.
쉼 없이 돌던 환풍기 소리가 순식간에 묻혔다. 곧이어 전자기타, 베이스기타가 경쾌하고 묵직한 사운드를 보태면서 앰프에서 증폭된 전자음에 15㎡ 남짓한 지하실은 터질 듯 울린다. 노래는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인데, 원곡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강한 비트의 록 버전으로 직접 편곡했기 때문이다.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테야." 음악에 흠뻑 빠져 마음껏 열기를 발산하고 있는 4인조 밴드에겐 이 좁고 허름한 지하실이 바로 '행복의 나라'다.
록 밴드의 멤버 4명은 대구ㆍ경북 지역의 초등학교 교사들이다. 전자기타의 석홍기(47)씨는 경북 경산초, 드럼의 노대형(47)씨는 구미 오산초, 베이스기타의 조봉민(37)씨는 대구 동변초, 보컬을 맡은 유일한 총각 신승윤(31)씨는 운암초 교사로, 모두 대구교육대 출신이다.
밴드 이름은 '신천옹'. 세상에서 가장 날개가 길고 폭풍 속에서 멀리 날아 자유의 상징이 된 새 '알바트로스'를 일컫는 말이다. 폭풍에 몸을 던진다고 해 붙여졌는지 '하늘을 믿는 늙은이'(信天翁)로 통하는 이 새처럼 멤버들은 음악에 대한 믿음으로 똘똘 뭉쳤다.
신천옹 밴드가 최근 큰 일을 냈다. 지난 7일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별관 강당에서 열린 제3회 공무원 음악대전에 나가 '행복의 나라로'로 대상을 거머쥔 것이다. 판소리과 클래식, 오페라 아리아, 사물놀이, 대중가요, 팝송 등 장르를 불문한 이 대회에는 전국에서 320여팀이 참가해 본선에 16개 팀이 올랐다.
"미끄러질까봐 예선조차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조용히 참가했는데 대상을 받아 너무 얼떨떨했다"는 조씨는 수상 순간의 감격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 듯 상기된 표정이었다.
이들은 학교에서 이미 유명인사가 됐다. "선생님 노래 한 번 불러보세요." "음악 시간에 선생님이 기타 연주회 여세요." "한턱 쏘세요." 아이들의 보채는 소리가 귀찮기는커녕 음악처럼 들린다고 했다.
신천옹 밴드의 뿌리는 2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구교육대 82학번 동기였던 석홍기, 노대형씨는 1984년 '에버그린'이라는 교내 그룹사운드를 만들어 활동했다. 후배인 조봉민, 신승윤씨도 이 그룹사운드 출신이다.
석씨는 졸업하고도 같은 학교 출신들로 직장인 밴드 활동을 계속 했는데, 신천옹이란 간판을 내건 것은 96년이다. 2003년 갓 제대한 신씨가 가입하면서 멤버가 여섯 명으로 늘었으나 지난해 여름 두 명이 탈퇴, 4인조 밴드가 됐다.
초창기부터 줄곧 보컬을 맡다 멤버 탈퇴 후 드럼으로 바꾼 노씨는 어깨 너머로 배운 드럼을 제대로 연주하기 위해 따로 개인교습을 받았다. 쉴 때도 손에서 드럼 채를 놓지 않는다. "모험이었지만 멤버들이 다들 믿어주고 격려해줘서 지금은 제법 '드러머' 흉내는 내지요."
음악에 대한 열정이 없었다면 이 밴드가 10여년을 이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20여년 교사 생활 대부분을 경북 영덕 바닷가에서 지낸 석씨는 매달 수차례 대구를 오가며 밴드를 이끌어 왔다. "직업으로 음악을 했다면 일찌감치 중도하차 했을 지도 모르지만 취미로 즐기고 있기 때문에 오래 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 음악이 저의 또 다른 삶이 됐죠."
신천옹은 자작곡도 많이 내놨다. '빈 깡통', '기타 등등', '꽃같이 아름답던 날', '차라 마'(치워라 그만) 등 자작곡으로 올 들어 두 번 대구의 소규모 클럽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직장인 밴드가 늘어난 것도 좋은 자극제가 됐다.
모교의 연습실에서 더부살이를 하던 신천옹 밴드는 지난 4월 드디어 자신들만의 연습 공간을 마련해 독립했다. 요즘은 매주 한 번 이곳에 모여 3시간 가량 호흡을 맞춘다. "연습 때마다 후배들에게 미안했는데, 누추하지만 우리만의 연습실을 갖게 돼 너무 좋다"며 멤버들은 입을 헤벌쭉 벌리고 웃었다.
하지만 방음장치가 신통치 않아 가끔 같은 건물의 학원에서 "조용히 좀 해달라"는 원성도 듣는다. 그래서 공무원 음악대전에서 상금으로 받은 300만원으로 우선 방음설비부터 장만하기로 했다. 또 지하실의 퀴퀴한 공기를 누그러뜨려줄 제습기도 마련하고, 몇 달 밀린 월세도 갚아야 한단다.
신천옹 밴드는 연습실 장만하고, 큰 대회에서 대상까지 탄 '운수대통' 한 2009년을 보내며 뜻 깊은 일을 벌일 작정이다. 이들에겐 음악 못지 않은 '영원한 친구' 어린이들을 위해 좋은 일 하나 하자고 궁리한 끝에, 연말에 난치병 어린이 돕기 자?공연을 열기로 했다.
내친 김에 좀 이른 감은 있지만 2010년 새해 계획을 물었다. "공연 계획이요? 연습실 월세도 몇 달치 밀려있는 처지에 무슨 계획을 세우고 할 처지가 아니죠. 좋아하는 음악 신나게 하다 보면 뭔가 또 일이 생기지 않겠어요?"
글·사진 대구= 전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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