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대생이 "키 작은 남자는 루저"라고 말할 수는 있다. 사석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어떤 여대생은 이 말을 공중파 방송의 카메라 앞에서 했다. 지난 9일 KBS2 '미녀들의 수다'에서 이 발언이 나가자 난리가 났다. '루저'가 검색어 순위 1위에 올랐고, 심지어 그 여대생의 학교 건물에는 누군가 붉은 선을 그은 뒤 '(이 선)이하=루저 입장 중'이라고 쓰는 자조적인 유머를 구사했다. 하지만 진짜 코미디는 그게 아니다. 논란이 커지자 여대생은 "대본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고, 제작진은 이를 부인했다. 하지만 이 발언이 누구에 의한 것이었는지 무슨 상관인가.
정말 문제인 것은 이런 발언을 그대로 내보낸 공영방송 제작진의 의식구조다. 키 작은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건 개인의 의사 표시다. 하지만 그들을 '루저'라고 하는 건 차별 행위다. 예전에는 인종이나 장애 여부가 미디어의 무신경한 차별의 희생양이 됐다. 그리고 이제는 외모에 대한 차별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미녀들의 수다' 제작진은 이번 논란에 대해 '솔직하게 터놓고 말하기'의 한 부분이라는 입장을 밝혔지만, 솔직하게 말하는 것과 매스미디어가 차별을 부추기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미국의 방송에서 인종차별 발언이 좀처럼 나오지 않는 건 모든 방송 진행자가 인종 차별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런 생각은 '솔직한 것'이 아닌 '부당한 것'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발언을 한 여대생이 다만 경우없이 경솔했을 뿐이라면, '미녀들의 수다' 제작진은 공영방송의 제작 윤리를 잊었다. 이런 프로그램에서 누가 또 '루저' 취급 받을지 알 수 없다. 그리고, 더욱 불편한 것은 '솔직한 말하기'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9일 방송에서 '미녀들의 수다'는 외국인 여자와 한국인 여자로 편을 나눠 그들의 주장을 쏟아내도록 했다. 그 과정에서 키 큰 남자, 조건 좋은 남자의 우월함을 주장하는 한국 여자들의 의견이 제작진의 별다른 적절한 중재나 가치판단 없이 그대로 방영됐다. 이 때문에 출연자들은 이견을 좁히기보다 생각을 쏟아내기에만 바빴고, 그 과정에서 문제의 발언도 등장했다. 솔직함을 핑계로 차별행위가 방송에 등장하고, 멋진 외국여자/생각 없는 한국여자, 조건 따지는 여자/못난 남자 같은 도식적인 편가르기가 생긴다. 그 결과 동시간대 시청률 꼴찌였던 '미녀들의 수다'는 오랜만에 화제에 올랐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미녀들의 수다'의 목적이 아니었을까. 하긴 제목부터 '외국여자'도 아닌 '미녀'들의 수다였다.
강명석 대중문화평론가 lennonej@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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