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 기념식이 열린 9일(현지시간) 밤 앙겔라 메르켈 독일총리는 통일독일의 상징 브란덴부르크 문을 동에서 서로 행진하는 이벤트를 연출했다. 그는 동서분단의 원인제공자들이기도 한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4대 강대국 정상과 수 십 여명의 유럽연합(EU) 정상들의 선두에서 이들을 이끌었다.
이 장면은 국제사회의 중심국가로 복귀한 독일과 국제무대 주인공으로 우뚝 선 메르켈 총리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을 맞아 국제 정치ㆍ외교무대에서 막강한 발언권을 행사하면서 슈퍼파워 미국도 거침없이 상대하는 메르켈 총리에 새삼 세계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메르켈 총리는 이날 행진 직전 기념사에서 "세계질서와 평화를 위해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다극화와 다자협력"이라며 "미국은 국제기구에 상당한 권한을 넘겨야 한다"고 미국의 일방주의를 겨냥했다. "워싱턴으로서는 특별히 아픈 비판"이라고 AFP통신은 지적했다.
미국에 대한 직설화법은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지난 3일 방미 중 가진 상하원 합동연설에서도 유엔기후변화 협상에 미국의 적극적인 자세를 촉구했다. 미 의회는 독일총리로는 52년만에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연설하는 영예를 안겼지만 메르켈 총리는 기후변화 입법에 미적대는 의원들에게 일침을 가한 것이다. 메르켈 총리는 최근 GM이 독일에 본사를 두고 있는 유럽자회사 오펠의 매각 철회를 돌연 발표하자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항의전화를 걸어 오바마 대통령의 해명을 듣기도 했다.
메르켈 총리의 힘은 달라진 통일 독일에서 비롯된다. 독일은 막강한 영향력으로 유럽연합(EU)를 주도하고 있고 아프가니스탄 파병, 기후변화협약 같은 세계 현안에 있어서도 선도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특히 내달 정치공동체로서 새 출발하는 EU에서 메르켈 총리는 막후 조정자나 다름없을 만큼 입김이 강하다. EU 정상회의 초대 상임의장 후보로 독주하던 토니 블레어 전 영국총리도 "초대의장은 유로화를 사용하는 소국에서 나와야 한다"는 메르켈 총리의 한마디에 뒷전으로 밀렸다. 당초 블레어를 지지했던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역시 그와 저녁식사 후 입장을 바꿨을 정도다.
EU 27개 회원국 정상이 베를린 장벽붕괴 기념식에 예외 없이 모인 것 또한 새로운 EU에 대한 메르켈 총리의 영향력을 반영한다. 사실 베를린 장벽붕괴 기념식은 이 사건의 세계사적 상징성뿐만 아니라 독일과 메르켈 총리의 위상을 확인하는 자리였다는 평가도 나온다.
■ 세계 전현직 정상 8인이 말하는 '베를린장벽 붕괴 20주년'
"때때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라를) 떠나야 했는지 감옥에 있었는지 잊는다… 자유의 기쁨이 오기 전에,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나와 콜 전 독일 총리의 통찰력은 뛰어나지 못했다. 장벽이 그렇게 빨리 붕괴할거라고 생각 못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1989년 11월 9일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베를린 장벽 붕괴보다 더 독재에 저항하고, 자유를 추구했던 사건은 찾아보기 힘들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해방이었으며, 오늘날에는 억압에 맞서 싸우라는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베를린 장벽 붕괴에 있어 구 소련의 역할을 잊어서는 안된다… 소련의 변화가 유럽에 도움이 됐고, 철의 장막을 거둘 수 있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
정진황 기자 jhch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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