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낙 촌(전남 진도)이어서도 그랬지만, 살림살이가 참 어려웠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학교를 계속 다닌다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현대중공업 김양호 기원(과장급 직급ㆍ47)은 그 때를 회상할 때면 까마득한 옛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김 기원은 1962년 전남 진도에서 태어났다. 그것도 9남매의 장남으로. 공부하기가 쉽지 않았다. 학교가 끝난 뒤, 들에 나가 일하는 게 당연한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고등학교를 못 가는 현실이 너무 안타까웠다. 꼭 가고 싶었지만, 상황은 그를 들에서 놓아주지 않았다.
중학교 졸업 후 1년간 농사 짓던 그는 부모님을 설득했다. "아버지께 졸랐습니다. 기술을 배워서 동생들 뒷바라지를 하겠다고요."그가 육지(나주)로 나와 기술고등학교(한독공고)로 진학한 이유다. 용접이 그의 인생의 '모든 것'이 될 줄은 그때까지도 알지 못했다. 3년간 열심히 갈고 닦았다. 용접과 배관 국가 자격증을 취득한 그는 81년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에 입사했다.
9남매의 장남 "기술 배워 동생들 뒷바라지하겠다" 기능인의 길로
불꽃에 화상 입고도 밤낮없이 실습 또 실습… 용접 자격증만 65개
탄탄대로가 열릴 것 같았다. 하지만, 현실은 예상을 보기 좋게 빗나갔다. 학교에서 배운 게 빙산의 일각이라는 걸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특히, 그가 몸담고 있는 해양플랜트 용접은 그에게 좌절과 용기를 동시에 가져다 줬다. "해양플랜트에 쓰이는 철은 그 재질이 일반 상선과는 다릅니다. 통산 수명이 30년 가량인 상선보다 20년 이상 더 사용하는 해양플랜트에는 더 강하고, 더 두꺼운 철판이 사용됩니다. 용접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던 거죠."
철판 두께가 보통 5~8㎝ 이상이다 보니 하얀 불꽃이 일으키는 용접봉으로 이음새를 여러 번 오가야 두 철판이 하나의 쇳덩이로 태어난다. 하지만 용접이 잘못돼 조그만 틈이라도 생기면 해양구조물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때문에 다년간 수려한 전문가들이 철판을 붙이더라도 초음파검사 등을 통해 내부 균열이 없는지 체크해야 한다.
"정성을 쏟아 일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습을 게을리하지 않은 것은 물론, 휴일이나 퇴근 후에도 도서관에서 가서 이론 공부도 했습니다." 얼굴에까지 화상을 입기도 했다. 몸 안으로 용접 불꽃이 들어와 고통을 느낀 적은 헤아릴 수도 없다.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편안해졌다. 기량은 점차 나아지기 시작했고, 속도가 붙으면서 즐거움도 함께 했다.
이런 열정은 그를 달인의 경지에 올려놓았다. 김 기원은 용접과 판금ㆍ제관 기능장이다. 용접 관련 자격증은 무려 65개나 된다. 글로벌 석유회사인 미국 쉘과 엑슨모빌, 프랑스 토탈 등은 모두 자사가 발주한 해양플랜트를 건조하는 조선소 인력에게 일정한 능력을 요구한다.
한마디로 그들이 인정하는 자격증을 있어야 하는데, 달인 김 기원은 이를 모두 갖고 있다. 28년간 한 우물을 파온 결과다. 작년 8월 정부는 그의 능력을 인정해 '대한민국 산업명장'의 지위를 부여했다. 산업명장은 산업현장에서 20년 이상 근무하며, 그 분야 기술발전에 크게 공헌한, 최고 기술력을 가진 기능인에게 주어지는 영예다.
그는 요즘 쉬운 것만을 좇는 후배들이 아쉽다고 했다. 힘든 일이긴 하지만, 업무환경은 과거 자신이 용접을 배웠던 80년대보다 크게 나아졌다. 지금은 시원한 공기가 주입되는 '쿨링 자켓'을 입으면 여름이라도 그리 어렵지 않게 일할 수 있다. 마스크와 귀마개 등 보호장구도 그 때와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좋아졌다.
장비만이 아니다. 배우는 환경도 과거와 다르다. 옛날처럼 선배에게 욕 먹으면서 배우는 일은 없다고 한다. "사회적인 분위기도 후배들이 기능을 멀리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저희 때만해도 '기능은 조국 근대화의 기수다'라며 기능인 우대정책을 폈는데, 요즘은 나라 정책의 우선 순위에서도 밀리는 것 같고…."
명장인 김 기원은 요즘도 또 다른 목표를 위해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2006년 주경야독으로 기계공학사 학위를 받아 현재 울산과학대에서 겸임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틈 나는 대로 사내 기술교육원 실습생들에게도 기술 지도를 한다. 물론 자신의 미래를 위한 준비(용접 기술사와 국제 용접감독관 자격증 취득)도 소홀히 하지 않고 있다.
손재주가 좋은 자신의 능력을 닮아서인지 고3인 딸이 현재 축구 국가대표 골키퍼로 활동 중이다. 부친 김길선 옹은 '진도 북놀이'무형 문화재로 평생 한 길을 걸어올 만큼 3대가 손기술로 살아간다.
"의지만 있다면 한 분야에서 최고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기능인을 우대해 주는 사내 분위기도 있었지만, 노력만 한다면 달인이 될 수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사내 기능장회 운영위원으로, 사회봉사활동에도 헌신하는 김 기원은 용접만의 달括?아닌 '인생의 달인'이었다.
울산=박기수기자 blessyou@hk.co.kr
■ 세계 최고 조선소 현대重 만든 '기술교육원'
현대중공업은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ㆍ최고 조선소다. 최근 들어 경기침체에 따른 선박 주문 급감으로 저가 수주에 나선 중국 업체들이 양적인 면에서 우리나라를 앞서고 있지만, 현대중공업이 1위라는 데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현대중공업은 여기에다 지능형 제어로봇, 변압기, 건설장비에 이르기까지 중공업 전반을 아우르고 있다.
거기에는 최고 기술을 가진 전문 기능 인력이 든든히 버티고 있다.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에 있는 기술교육원이 바로 '기능 마에스트로'육성의 메카다. 현대중공업 기술교육원 탄생은 197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산업화 초기였던 당시 사내 훈련원으로 문을 연 기술교육원은 '조국 근대화는 기능에서 나온다'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전문적인 교육과정을 확대하면서 오늘날 국내 최대 기능 교육기관으로 자리잡았다.
현재 연 4,000명 규모의 우수 기능 인력을 교육시켜 배출하는데, 여기서 훈련 받는 인력들은 사실상 100% 취업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용접, 도장, 전기전자, 제어기술 등 현장에서 곧바로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을 습득한 인력들이 교육만 제대로 받는다면 곧바로 현대중공업 협력업체에 배치되기 때문이다. 특히, 훈련기간 교육비와 숙식비 등이 모두 무료이고, 매월 20만원의 교육비가 지급되며, 현장실습의 경우 생활비 형태로 50만원이 제공된다.
입소 경쟁률이 치열할 수밖에 없다. 현재 군필자로 나이제한은 만 35살인데, 대졸 훈련생도 적지 않다는 게 교육원측의 설명이다. 특히, 협력업체 수련과정을 거쳐 현대중공업에 입사할 경우, 3,000만원 이상의 연봉과 다양한 복지혜택을 누릴 수 있다. 사실상 일반 근로자로서는 국내 최고 수준의 대우를 받는다.
기술교육원은 외부 협력사 직원과 고객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도 실시하고 있다. 기술 강국을 위해서는 산업 전반의 경쟁력 향상이 가장 중요하다는 판단에서다. 유태근 기술교육원장은 "경기침체로 취업난이 심화하고 있지만, 기술교육원 수료생은 95%의 취업률을 자랑한다"며 "더욱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해, 청년 실업 해소에 기여하겠다"고 밝혔다. 현대중공업 기술교육원 (052)202-2352
박기수기자
■ 現重장학생 선발 등 인재발굴·산학협력에도 '발군'
기업 경쟁력이 사람에게서 나온다는 것은 경영의 기본이다. 현대중공업이 캠퍼스에 있는 우수 인재를 발굴ㆍ육성해 다양한 지원을 아끼지 않은 이유다.
대표적인 사례가 현중장학생 선발. 이 제도는 대학교 재학생(학ㆍ석ㆍ박사)을 대상으로 연구개발, 설계, 영업 등 각 분야 전문가를 육성하기 위한 것으로, 선발 인원에게는 등록금과 학비 보조금을 지원하고, 졸업 후에는 현대중공업 입사를 보장해 준다. 현대중공업은 매년 30여명을 현중장학생 제도를 통해 채용하고 있다.
대학과의 산학협력도 활발하다. 현대중공업은 2006년부터 울산대와 공동으로 '조선해양 일류화 프로젝트'(SOTOP)를 추진 중이다. 교내에 2008년 첨단 선박 실험실을 갖춘 조선해양공학시험동을 개관한 것을 비롯, 울산대 조선해양공학부를 조선 분야 세계 최고 학부로 육성한다는 계획을 담고 있다. 작년 착공한 군산조선소와의 연계성을 위해 군산 군장대와 조선 전문 인력 육성을 위한 산학협동협약도 체결, 이 학교 조선정보공학부 재학생 100여에게 군산조선소에서 근무할 수 있는 기회를 우선 부여하기로 했다.
핵심 기술 확보를 위한 산학 공동 연구에도 힘을 쏟고 있다. 현대중공업은 1994년부터 고급기술 육성을 위해 서울대 KAIST 포항공대 울산대 등 국내 20여개 대학들과 공동으로 과제를 연구하고 있으며, 여기서 에너지 효율이 높은 첨단 선박 디자인을 개발하는 등 약 400여개 과제를 수행했다.
박기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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