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3년(태조 2년) 정월 권중화(權仲和)라는 문신이 공주 계룡산이 신도(新都)의 적지라 해 태조가 무학(無學)과 함께 돌아보고 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하륜(河崙)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하륜은 무악(毋岳)을 천거했으나 정도전 등이 터가 좁다고 반대했다.
그리하여 태조는 다시 한양(현 청와대 자리)을 돌아보았다. 무학은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고 백악과 남산을 좌청룡 우백호로 해 동향으로 도읍을 세우자고 했다. 그러나 정도전은 "옛부터 제왕은 다 남면하고 다스렸지, 동향을 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며 좀 더 내려가 넓은 곳으로 정하자고 했다.
이곳이 정궁인 경복궁이다. 이에 무학이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이후 200년에 걸쳐 반드시 내 말을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신라 의명(義明)대사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시비를 걸면 5세를 지나지 않아서 왕위를 찬탈 당하는 사건이 일어날 것이고, 200년 만에 전국이 혼란스러운 난리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출전 <五山說林> )했다. 단종이 쫓겨난 계유정란과 임진왜란이 그것이라는 것이다. 五山說林>
이에 그 해 9월 1일 천도를 위한 임시 기구인 신도궁궐조성도감이 설치되고 정도전은 그 판사로서 한양에 종묘, 사직, 궁궐, 관아, 시전, 도로의 터를 정하고 이를 그림으로 그려 왕에게 바쳤다. 새 국도의 청사진이다.
정도전은 이 해 12월 3일에 종묘와 사직의 기공식을 행하고, 왕을 대신해 황천후토(하늘의 신과 땅의 신)에게 제사를 올렸다. 그리고 신도가(新都歌)를 지어 공역에 참가한 자들에게 부르게 했다.
1395년 9월에 경복궁과 종묘가 완공되자 12월에 왕이 새 궁궐로 이사했다. 태조는 정도전으로 하여금 궁궐의 모든 전각과 문루의 이름을 짓게 했다. 그리고 뒤이어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정도전에게 도성의 자리를 정하라고 했다. 그리하여 백악, 인왕산, 남산, 낙산을 잇는 17㎞의 도성을 쌓았다. 성문 이름도 정도전이 지었다. 뿐만 아니라 1398년 4월에는 정도전이 한성부 5부 52방의 이름도 지었다.
그러나 1398년 8월 16일 '제1차 왕자의 난' 때 반역으로 몰려 죽었다. 죄명은 서자(庶子)인 이방석을 세자로 추대한 것과 세자를 보호하기 위해 이복 형들을 죽이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자를 세운 것은 태조이지 정도전이 아니며, '제1차 왕자의 난' 직전에 정도전이 전실 형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여 일망타진하려 한 근거는 없다.
그렇지만 새로 집권한 태종의 후예들에 의해 정도전은 조선왕조 내내 신원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고종 때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그 설계자인 정도전의 공로를 인정해 1865년(고종 2년)에 그의 봉작을 회복해 주고, 그 후에 문헌(文憲)이라는 시호와 유종공종(儒宗功宗)이라는 편액을 내려주었다. 이러한 내력으로 보면 새로 조성되는 광화문 광장 어디엔가 정도전의 동상 하나쯤은 세워주어도 좋지 않겠는가?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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