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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공옥진은 무형문화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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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공옥진은 무형문화재가 아니다

입력
2009.11.10 0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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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명절이면 TV 방송에서 '외국인 장기자랑 대회'같은 프로그램을 방영하곤 했다. 꽤 오래 전 어느 해 설날 TV 프로그램에서 봤던 한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사회자는 상투적으로 참가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한국의 전통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무엇인가?' 그러자 그 외국인 참가자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중 목욕탕'이라고 대답했다.

"창작은 전통이 아니다"

순간 사회자의 얼굴에 당혹스러워 하는 표정이 잠깐 스쳤다. 기대했던 답이 아니라는 표정이었다. 그는 얼른 말을 돌려 "그런 것 말고 연날리기, 제기차기 같은 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되물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전통'에 관한 두 개의 상이한 개념이 교차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사회자는 민속촌이나 민속 박물관에 박제된 모습으로 남아있는 '과거의 것들'을 전통으로 생각한 반면, 장기 자랑에 참가한 외국인은 '우리의 현재 모습'에서 전통을 발견한 것이다.

두 사람 가운데 과연 어느 쪽이 전통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가졌다고 볼 수 있을까? 우리 대부분은 이 프로그램의 사회자처럼 전통을 '과거'에 속한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어쩌면 그 사회자는 전통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은연중 대변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과연 전통은 반드시 과거에 속한 것일까? 미국 예일대 교수인 사회학자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전통의 시제(時制)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라는 것이다.

며칠 전 KBS에서 흰 무명저고리에 버선발로 부채를 들고 무대를 누비던 공옥진을 특집으로 방송했다. 그는 지금 뇌졸중, 교통사고 후유증과 싸우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티고 있다. 많은 사람이 그를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알고 있지만 그는 무형문화재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가 추는 '1인 창무극'을 중요무형문화재로 인정하려는 노력이 없었던 건 아니다. 1999년 전남도 문화재위원회가 1인 창무극을 심의했지만 비밀투표 끝에 부결시켰다. "1인 창무극은 전통을 계승한 것이 아닌 본인이 창작한 작품"이라서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공옥진이 세상을 떠나는 날엔 1인 창무극도 볼 수 없게 됐다.

무형문화재로 인정받지 못하니 뒤를 이을 사람도 없다. 투병 전엔 사비를 들여 제자를 키웠지만 지금은 그들도 모두 흩어지고 전남 영광에 있는 한현선씨 1명뿐이다. 그나마 수제자 한씨도 대학에 진학하면서 전공을 '1인 창무극'에서 판소리로 바꿔야 했다. 공씨는 '사람들은 내가 무형문화재 보유자인 줄 알지만, 난 정작 문화재의 '문'자만 들어도 가슴이 무너진다'고 말한다.

일부 국악 전문가들은 '1인 창무극'이 나름대로 '과거의 전통'에 기반을 갖고 재창조한 것인 만큼 문화재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최근 공옥진이 조선왕조실록 연산군 일기에 등장하는 악공 공길의 후손일 가능성이 제기된 것도 이런 맥락이다. 과거와의 연결 고리를 어떻게든 찾아보려는 안타까운 시도로 볼 만하다.

'새로운 전통' 물려주어야

하지만 전통을 박제된 과거의 것으로만 바라보는 경직되고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공길'과의 관련성이 있건 없건 상관없이, 당대에 창작된 것이라 할지라도 다수의 전문가들에 의해 예술적 가치와 완성도가 인정된다면 '새로운 전통'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사리에 맞다.

판소리와 같은 '공인된 전통'도 과거 한때 누군가에 의해 '창작'된 것이었다. 우리가 오늘날 이룩한 문화적 성취 가운데 영속적 가치가 있는 부분은 이미 새로운 전통의 반열에 진입한 것으로 봐야 한다. 전통의 시제는 현재이다. 지금 세대는 과거에서 비롯된 새로운 전통을 후세에 물려줄 의무가 있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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