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0년 동안 괄시하더니 요샌 너나없이 떠받든다더만."
골프장에서 게임 중간중간 다리쉼하며 목을 축이는 곳을 '그늘집'이라 한다는데, 얼마 전 거기서 막걸리를 주문해 마시던 한 지인이 그러더라며 회사 선배가 툭 던진 말이다. '바깥' 마당에 막걸리를 써보라고 주문한 게 벌써 한 달 전인데, 줄곧 미적거리는 게 내심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마케팅 용어로 '막걸리의 TPO(Time, Place, Occasion)', 곧 막걸리가 놓여 어색하지 않은 때와 시간, 상황이 일변했음은 다시 들춰 확인하기도 객쩍을 만큼 자명해졌다. 대형 매장의 유제품 냉장 매대에 막걸리가 우유와 나란히 진열된 지도 오래됐고, 도심의 주요 백화점들도 와인 매장을 줄이고 막걸리 매장을 따로 마련할 정도로 모심에 열심이다.
10여 년 전 캔 막걸리가 처음 나왔을 때 국적기에 전통 술 하나쯤은 들어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제안을 여지없이 내쳤다는 항공사들도 경쟁적으로 막걸리 기내 서비스에 나섰고, 크고 작은 국제 행사에서 참석자들이 와인잔에 담긴 막걸리를 건배주로 들곤 한다.
부산의 한 대학은 막걸리 연구소를 설립했고, 학생들의 막걸리 애호가 학교 이미지를 텁텁하게 만든다고 우거지상을 짓곤 하던 서울의 한 대학은 학교 이름을 붙인 막걸리 브랜드를 내놓을 태세다. 대통령까지 '막걸리 홍보책임자'를 자임하고 나섰을 정도이니 막걸리 열풍은 연말 언론의 '올해의 히트상품'은 떼놓은 당상이고, '뉴스 톱 10' 리스트에서 피겨 여왕 김연아의 활약과 수위를 다툴 판이다.
그래서 오히려 이 마당에 어울릴까 깐을 봤던 것인데 그예 이렇게 초대를 한 것은, 애초에 이 '바깥' 마당의 경계가 흐릿할 것이라고 밝힌 바도 있거니와, 막걸리가 도자기 용기에 담겨 백화점 진열장에 놓였더라도 그 원래의 '바깥스러운' 뉘앙스까지 바뀌지는 않을 것 같아서다. 그게 편견이나 선입견 때문이라 해도 그대로도 들여다보고 반추할 필요는 있을 터. 가동 중인 곳만 700여 곳에 이른다는 중ㆍ소 규모 양조장 대신 설비나 기술 면에서 가장 앞서 있다는 막걸리 제조공장을 찾아간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지난 금요일 강원 횡성군 둔내면 현천리 국순당 공장의 막걸리 라인은 듣던 바대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수요가 그만큼 늘어나기도 했겠고, 새로 개발한 막걸리 상품을 막 출시한 까닭도 있는 듯했다. "지난 한 해 동안 총 35만 병(750㎖ 기준)을 생산했는데, 요즘은 하루에 10만여 병씩 만드는 날도 있습니다. 막걸리 전용 라인을 곧 증설할 계획입니다." 생산본부 최영환(43) 생산부장은 "약주(백세주) 공장이 근래엔 막걸리 공장이 다 됐다"며 살짝 들뜬 기색으로 말했는데, 공장 안은 과연 아린 듯 싸한 알코올 기운과 새큼달큼한 향기로 그득해 금세 낯빛마저 불콰해지는 듯했다.
이런저런 기회로 양조장 술도가는 구경한 바 있지만 '컴퓨터 제어 최첨단 술 공장' 견학은 처음이었다. 자체 연구소에서 필요한 미생물만 선별적으로 키웠다는 배양액으로 밀기울을 반죽하는 공정서부터 누룩을 띄우는 항온항습실, 효모 저장고, 발효된 술을 거르고 적정 도수를 맞추는 제성 공정까지 기계와 파이프가 일괄라인으로 짜여 있고, 사이사이 하얀 위생복 차림의 직원들이 기계의 일을 거들거나 관리하고 있었다. 어른 키 세 길이 넘는 높이로 줄지어 선 4만 리터 들이 스테인리스 발효탱크마다 막걸리 원주(原酒)가 부글부글.
"별다른 설비나 기술 없이도 '마구' 걸러 마실 수 있다고 막걸리라 한다지만 전 '막' 걸러서 마셔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는 술이라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바로 그 막걸립니다." 맛의 정수를 선뵌다는 자부심으로 최 부장은 '막' 걸러진 걸쭉한 원주를 한 국자 떠서 건넸는데, 술맛은커녕 알코올이라면 도수 불문 경기하는 체질임에도 그의 자부와 정성 깃들인 대접을 받드느라 어쩔 수 없이 한 모금 베어 물어야 했다. 그가 면접관 앞에 선 수험생처럼 골똘히 표정을 살피려 드는 바람에 오장까지 뒤틀면서도 차마 얼굴은 찡그릴 수조차 없었는데….
_ 맛이 아주 와일드하네요.( ;)
"알코올 도수가 17도쯤은 됩니다."( )
그 와일드한 막걸리의 맛을 그는 "둥글둥글하다"고 표현했다. "어느 안주, 어떤 음식과도 어울리죠. 곡류를 주식으로 먹어온 사람이라면 막걸리는 첫맛부터 결코 낯설지 않을 겁니다." 그의 말처럼 막걸리는 주조 원리와 절차가 베이직하고, 또 그래서 원료의 원형적 개성이 가장 잘 살아있는 술 가운데 하나다. 전분에다 누룩(효소)을 넣으면 당분으로 분해되고, 당분에 효모가 끼어들면 알코올로 발효되는데, 이 두 공정이 한꺼번에 진행된다고 해서 전문가들은 막걸리의 양조법을 '병행 복(複)발효'라고 부른다.
발효된 액을 용惻?체로 거른 게 약주나 청주이고, 남은 술에서 지게미만 거르면 탁주, 곧 막걸리다. 공정이 단순하고 숙성도 필요 없어 값이 싸고, 대충 걸러 식이섬유와 식물성 유산균이 넉넉하기 때문에 정장 효과와 피부미용에 좋고, 안주 없이도 목넘김이 좋은 데다 칼로리도 상대적으로 낮아 다이어트에도 좋고, 기술도 좋아져 막걸리의 단점들_트림, 텁텁함, 저장성 등_도 대폭 개선됐고…, 예제서 들리는 막걸리 찬가는 끝이 없는데 그 좋은 걸 왜 지금껏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이웃 나라에서 입맛을 다시니까 이제야 '환장'들을 하는지 의아할 지경이다.
막걸리는 추억과 이야기가 스민 술이다. 양은주전자 들고 어른 심부름 다니던 어릴 적부터 젖은 손등 핥아가며 맛보던 달착지근함, 술지게미의 시금털털하고 고소한 맛을 기억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막걸리의 두터운 빛깔과 툽툽한 질감에는 소주나 맥주, 와인이 넘볼 수 없는 푸근함이 있다.
그래서 막걸리는 서민의 대표 술로 꼽히기도 하는데, 그 같은 서민성이 과연 사적(史的) 정통성의 받침 위에 얹힐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서민들에게 쌀이나 밀은 고사하고 옥수수 조 수수 보리 기장 따위의 탄수화물이 넉넉했던 시절이 그리 넉넉했을까 싶기 때문이다. 즐겼다면 아마도 귀하게 즐겼을 것이다. 맛의 정체성도 다른 술과 달리 짧은 몇 마디로는 묶이지 않는다.
지역에 따라 재료도 달랐을 테고, 전분을 당분화하고 당분을 알코올로 분해하는 효소와 효모의 종류_최 부장은 이것들이 막걸리의 맛을 결정짓는 데 상당히 기여한다고 했다_도 마을마다 집집마다 달랐을 것이다. 막걸리는 금세 변질되기 때문에 아무리 이름난 동네 막걸리여도 그 위세를 먼 이웃 마을까지 떨칠 수 없었고, 그래서 포장 기술이 좋아진 지금까지도 그 복잡 미묘한 다양성의 춘추전국시대를 누리고 있는 것일 테다.
모르긴 해도 보르도 와인과 칠레 와인의 맛의 차이가, 컴퓨터로 제어되는 스테인리스 발효탱크의 쌀 막걸리 맛과, 쉰 보리밥을 옹기에 넣어 손으로 빚는다는 제주도의 '쉰다리' 맛의 차이만큼 크지는 않을 것이다.
농수산물유통공사에 따르면 막걸리 수출 물량은 1998년 약 63만㎏에서 10여년 만인 지난 해 550만㎏으로 급증했고, 올 들어 9월까지 440만㎏을 기록하고 있다. 국순당 막걸리의 경우 이미 아프리카와 남극을 제외한 전 대륙 15개국에 수출되고 있고 대상 국가와 물량도 늘어나는 추세라고 했다.
막걸리가 세계 시장에서 영속적으로 돋보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는 맛의 정체성도 유지해야 할 것이고, 규모의 경제 효과도 무시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 경쟁의 양상이 지역 단위 양조장까지 질식시킬 정도로 와일드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경쟁의 논리란 본래의 의미와 달리 힘센 자들이 사후적으로 펼치는 패권의 논리인 경우가 많고, 그 논리는 문화의 본래적 의미에 비춰 비문화적이거나 반문화적이기 쉽기 때문이다.
가령 민족(국가) 문화의 경쟁력을 위해 지방 문화의 희생은 사소하다는 식의 발상이 그런 것일 텐데, 우리에게는 거대한 규모의 경쟁력에 눌려 질식해버린 것들이 너무 많았고 그 중에는 한 때 700여 종에 달했다는 빛나는 가양주(家釀酒ㆍ집에서 빚은 술) 문화도 포함될 것이다.
막걸리의 자기동일성은 그 탁한 빛깔처럼 모호하고, 또 모호해야 막걸리다. 모호함은 다양성의 한 형식이고 무한한 가능성의 잠재태이다. 시음한 한 모금의 막걸리에 취해 '미몽(米夢·국순당의 일본 수출용 막걸리 이름)'으로 어순선했던 귀경길. 막걸리가 지금 꾸고 있는 꿈도 화려한 현실의 양상처럼 달지만은 않을지 모른다.
최윤필 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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