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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입동(立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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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입동(立冬)

입력
2009.11.08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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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몰아쳤던 기습 한파가 물러나고 따뜻한 가을이 이어지고 있다. 지구 온난화만 아니었어도 실은 겨울 기운이 완연할 때다. 윤달만 없었다면 음력 10월이고, 시제(時祭)가 한창일 무렵이다. 어릴 적 재실에서 집안 어른들과 함께 자고 일어나 졸린 눈을 비비며 아버지 손을 잡고 길을 나서야 했다. 역대 할아버지 산소를 돌며 간단히 제를 올리던 게 꼭 이맘때지 싶다. 길섶의 풀은 마르고, 가을걷이가 끝난 밭에 더러 남은 배추나 무 잎사귀는 서리를 맞아 축 늘어져 있었다. 땅의 서릿발이 작은 발 아래 폭삭 무너지는 느낌이 상쾌했다.

■오늘은 겨울의 초입인 입동이다. 계절이 양(陽)에서 음(陰)으로 넘어가는 때, 나무가 잎을 다 떨구는 때, 한 해 농사가 다 끝나고 겨울나기 준비에 들어가는 때이다. <농가월령가> 시월령은 무 배추를 거둬 냇물에 깨끗이 씻어 알맞게 절인 후 온갖 양념을 해서 김장을 담가 항아리를 짚으로 싸서 깊이 묻는 김장을 월동 준비의 으뜸으로 꼽았다. 그리고 나서 방고래 청소, 바람벽 메우기, 창호 바르기, 쥐구멍 막기, 수숫대 덧울과 외양간 떼적을 마치고, 부녀자들이 겨울 옷을 지으면 비로소 준비가 끝나는 게 전통 농가의 삶이었다.

■도시의 월동 준비도 거의 다르지 않았다. 창고 가득히 연탄을 쌓거나 김장을 마친 후 남은 푸성귀를 엮어 매달아 시래기로 말렸다. 청춘들은 '후지카 마련하기'미팅으로 바빴다. 30여년 전 석면 심지가 달린 석유난로 가운데 '후지카'라는 상품명이 꽤나 유명했다. 당시 젊은 남녀의 집단 소개팅에서는 요즘의 '폭탄카' 대신에 '후지카'라는 말을 썼다. '후지다'는 속어에 '카드'를 줄여 붙인 말이다. 묘하게 '후지카'라는 난로 이름과 겹쳐서 쓰였다. 외모는 썩 훌륭하지 못하더라도 따스한 마음만은 높이 살 만하다는 위로나 배려가 담긴 말이었다.

■겨울을 앞두고 준비해야 할 게 난로뿐일까. 장작불로 구들을 태우듯 달구고, 난로로 방안 공기를 데워도 외로운 청춘의 마음 한 구석에는 찬바람이 파고 들었다. 그 찬바람은 잘났건 못났건 마음의 주파수를 맞춰 정서적 교감을 할 수 있는 짝으로나 막을 수 있는 것이었다. '후지카'도 없이 겨울을 맞는 청춘은 가여웠다. 세상의 겨울에서 계절과 청춘의 추위가 다일 수 없다. 쪼들리는 생활이 던지는 추위, 물질적 충족으로도 막을 수 없는 마음의 추위도 무섭다. 입동 날 아침 문득 "후지카 챙겼습니까"라는 30여년 전의 물음을 꺼내 든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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