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발간은 2001년 편찬작업이 본격 시작된 이래 무려 8년만이다. 굴곡의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만큼이나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작업이 시작되기 전부터 연구소는 위기를 맞았다. 1996년 6월 1,000여명이던 후원회원이 외환위기 여파로 1998년 8월에는 200여명만 남았다. 월 5,000원, 1만원씩 회비를 내던 소시민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외환위기의 여파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방학진 사무국장은 "연구소의 존립이 힘들었던 만큼 연구소가 유지된 것 자체로 의의가 있었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1999년 4월 연구소는 동력을 얻기 위해 친일인명사전편찬지지 교수 1만인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교수들에게 편지와 팩스 등을 보내 지지를 호소했고, 4개월만인 8월 초 교수 1만명의 서명을 받아내는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2003년 12월 또 한번 시련을 겪는다. 2004년 친일단체 인물연구사업의 일환으로 '일제하 지방 친일단체 편람'을 펴낼 예정이었는데 국회가 이 사업에 책정한 예산 5억원을 전액 삭감했다.
이 소식을 접한 시민들이 자발적인 성금 모금에 나서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가 됐다. 2004년 1월 초 전국적으로 참여열기가 확산돼 3만여명의 시민들이 11일만에 5억원의 성금을 모았고, 이후 총 7억원이 연구소로 전달됐다.
보수단체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이날도 국민보고대회에 앞서 박정희바로알리기국민모임 등 20여개 보수단체들이 행사장소인 숙명여대 숙명아트센터에서 '민족문제연구소 해체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반발했다.
보수단체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자 행사장소인 숙명아트센터를 위탁 운영하는 업체는 안전상의 이유로 행사 이틀 전 대관을 취소했다. 결국 연구소는 인근 효창공원 백범 김구선생 묘소로 발길을 돌려 행사를 치렀다.
박민식기자
김현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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